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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별 설교 예문

[설교 예문] 주여 나는 아니지요 <마태복음26장 14-25절>

by 크리스천투데이 일본지사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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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여 나는 아니지요
본문 : 마태복음26장14-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여인의 아름다운 비움의 이야기도 함께 말해서 기억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바로 유다의 배반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어요. 즉 마리아의 이야기와 유다의 배반이 어떤 관계가 있고, 주려는 교훈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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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마태는 가롯 유다라고만 표현하지 않고, 12중에 하나인 가롯 유다라고 기록했어요. 이 말은 제자 중에서 배반자가 나왔다는 거에요. 그는 원래 12명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거에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 중에서 배반자가 나온 거에요. 오늘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배반자가 나왔다는 거에요. 다시 말하면, 우리도 언제나 유다와 같은 배반자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긴장감을 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반면의 교사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는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넘겨준 사람이 누구냐. 그건 제자중 한 사람이었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자 가롯 유다가 누구에게 갔습니까. 대제사장들에게 갔어요.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돈을 사랑하고, 돈을 좋아하고, 탐욕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들을 죽이려는 자들이었어요. 바로 탐욕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간 거에요. 가슴아픈 이야기에요.

사실 유다에게 있어서 대제사장들은 어떤 이들이었냐면, 정반대의 노선을 추구하던 부류였어요. 유다는 힘과 혁명을 통해 로마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열심당 출신이었고, 반대로 대제사장들은 로마의 권력에 빌붙어 돈을 모으고 타락한 종교정치인이었어요. 유다와 대제사장이 같이 있을수 없는 이들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나 유다가 누구에게 갔나. 탐욕에 물들어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야합을 한거어요. 이렇게 말했어요.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이 말은 유다가 은30에 혹해서 예수님을 바꾼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30의 가치는 그리 크지 않아요. 구약 성경에 보면, 은30은 노예한명을 살수 있는 정도였어요. 큰 돈이 아닌 거에요. 그럼 생각해야 하죠. 유다가 왜 주님을 배반하려고 했나… 왜 주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왜 그리로 갔냐라는 거에요.

이것은 비움과 버림과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마리아의 이야기와 붙여 놓은 거에요. 마리아는 비움을 상징하지만, 유다는 비우고 버림을 걸어온 제자가 아니었어요. 주님을 따르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태복음4장에서 예수님이 첫 4명의 제자를 부르실 때, 제자들은 배와 그물과 아비를 버려두고 쫒았습니다. 버림으로 제자의 길을 걸었어요. 그런데, 1차원적인 버림만이 버림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가졌던 세상적인 생각, 가치관, 야망,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믿어왔던 나의 세상적인 신념들.. 제자들은 이것마저도의 비움이 있었어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잘못된던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진리로 나를 채워갔어요. 무엇이 진리이고 비진리인지 구분하고, 진리를 내안에 채우며 살았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나라를 제자들도 자기 마음에 품고 살았어요. 

그러나 유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1차원적으로는 그는 도둑이었어요. 요한복음에 보면 향유 옥합을 부은 마리아를 향해서 ‘그걸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수 있었다고, 말핟고, 낭비라고 말한 자가 유다에요. 그러면서 요한은 12장6절에서 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감이라 라고 했어요. 그가 돈을 좋아 한 것은 맞아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에요. 

유다는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생각을 비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이념과 가치관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로 세우려고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세상을 이룰 대상으로 주님을 따른 거에요. 열심당 출신의 유다의 생각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이었어요.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 기적을 일으키시고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처럼, 유다는 예수님이 그렇게 로마를 대항하고, 로마의 폭정을 전복시키기를 바랬어요. 

그런데 주님의 삶을 가까이 보면 볼수록,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님이 가시지 않는 거에요. 로마 전복이라는 거사를 실행하시키는 커녕, 오히려 이제 자신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저주라고 불리는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유다는 자기 자신의 신념과 야망을 비우지 않았어요. 스승의 가르침, 하나님 아들의 겸손한 복음의 세계를 자신의 삶이 걸어가야할 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이것이 유다가 스승을 배반한 이유에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했어요. 순종하지 않은 거에요.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이죠. 그러기 위해서 제자는 자신의 갖고 있던 생각을 비우고, 내려놓을 때 가능한 것이죠. 유다는 예수님과 3년간 동거동락하며 그분이 보여주신 아름다운 일들, 놀라운 기적들, 그분이, 말씀하신 세상과 다른 가르침과 진리를 보고 들었지만, 유다는 결국 자기 내면에 깊은 자신의 신념과 야망을 버리지 못했어요. 꺽지 못했어요. 이기지 못했단 말이에요. 그럼으로 유다는 배반자의 길을 걸은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을 믿기 전과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여러분안에 1차원적인 비움이 있었습니까. 배와 그물과 아비를 버리는 버림이 있었습니까. 그랬다면 훌륭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버림이 있었습니까. 내 생각, 세상적인 욕심, 세상적인 야망, 내 신념… 이것들에 대한 비움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여전이 내안에서 싸움이 있습니까. 부딫힘이 있습니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했어요. 눅22:3절, 요한13:27절, 예수님은 사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어요. 

요한8장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거짓을 말하고, 살인하는 자인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어요. 진리를 깨달음으로 사탄의 거짓을 이겨야하는데, 오히려 거짓과 살인하는 사탄을 따르게 된 거에요. 주님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세요.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진리를 말해도 왜 안듣습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사탄에게 속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다는 비우지 않았고,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따르면서도 믿지 않았어요. 그 안에 얼마나 번민과 고민이 있었겠어요. 진리를 들을 때 맞다는 생각은 들지만, 내 생각을 버리지 못함으로 부딫히는 그 세계가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어요… 유다는 돈도 사랑했지만, 자기의 잘못된 신념과 가치관을 더 사랑한 거에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사랑하는 주님을 이용한 거에요.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져녁 식사를 하시며 제자들에게 충격인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식사 중에 주님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제자가 스승을 판다고 하세요. 모든 것을 버리고 쫒고 사랑하고, 놀라운 일을 보고 경험한 제자가 스승을 팔게 된다고 하십니다. ‘판다’는 것은 바꾼다는 것이죠. 상업적인 용어에요. 지금 유다는 겉으로는 돈을 받고 판 것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야망, 잘못된 신념과 바꾼 것입니다.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제자들이 스승의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쫒은 스승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자들이 각각 물었어요. “주여 나는 아니지요?” 이 제자들의 물음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에요. 혹시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배반할지도 모르는 약함과 두려움과 염려스런 물음이에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유다도 물었습니다. 이미 유다 안에는 결심이 선 상태입니다. 스승을 팔기로 결정하고, 대제사장과 거래를 한 뒤였어요. 근심석인 다른 제자들과 달리, 외식적인 질문이에요. 주님은 이미 유다의 마음을 다 알고 계셨어요. 만약 유다가 지금이라도 자신의 검은 거래를 스승에게 말하고, 고백했다면, 그의 삶이 비참한 끝을 맞이하지 않았을 거에요. 이 자리에서 주님 제가 사실 주님을 팔기로 했다고, 죄를 드러냈다면, 그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 거에요.

그러나 유다는 자신안에 들어간 사탄의 음성을 이기지 못하고, 스승을 팔아 넘길 흉계를 그대로 진행하게 됩니다.

설교 제목을 제자들의 질문으로 정했어요. ‘주여 나는 아니지요” 이 질문을 우리가 주님앞에서 스스로에게 던져보시길 바랍니다. 배반의 자리에 제가 서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의 유혹이 올때,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길을 포기하고 싶을때, 돈의 유혹이 올때, 나의 생각과 신념으로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못하게 할때, 이 질문을 던져 보십시요. “주님 나는 아니지요”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나의 실리와 이익이 되는 문제라면 예수도 팔수 있다. 우리의 들키고 싶지 않은 본성이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거에요. 그분이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하는 것이고, 그분이 섬긴 자들을 나도 섬기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만들어 가려하셨던 하나님나라는 힘과 권력의 세계가 아니고, 섬김과 비움과 겸손으로 가득찬 세계라는 것, 서로 사랑하는 세계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어요.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늘 이 기회만 엿보는 삶이 얼마나 저주스런 삶입니까.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않는 듯한 삶이 얼마나 괴로운 삶입니까… 예수님을 결국 판 유다의 인생의 결말은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남아요. 배반의 끝은 저주와 후외에요.

마태복음27장3-5절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그는 자신이 죄를 범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비참한 삶을 맞았습니다.

유다의 모습을 우리가 반면의 교사로 삼아,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야망과 신념을 쫒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를 비우고, 그 비운 자리에 예수님의 말씀을 채우고, 그분 의 꿈을 내 꿈의 자리에 채움으로 생명의 주님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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