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故 한경직 목사님의 생전 설교 전문을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제공으로 매주 한 차례 소개합니다. 한 목사님은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생전 설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생생히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0:24~33
1947년 설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더욱 두려워하라”(마 10:28)
이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이로써 주님께서는 인간이란 영혼과 육신으로 된 것을 분명히 가르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로마서를 보면 “대저 육을 좋아하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을 좇는 자는 성령을 생각하나니 육의 생각은 죽는 것이요 성신의 생각은 사는 것과 평안함이니 라”(롬 8:5~6)는 말씀이 있고, 갈라디아서를 보면“대저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여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나니라”(갈 5:17)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육신 과 영혼이 두 가지 부분을 기초로 하여 일어나는 두 가지 소욕과 사상의 충돌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영과 육 두 가지 부분으로 성립되어 이 두 부분을 기초로 삼아 육을 기초로 하여 생기는 모든 소욕과 영을 기초로 하여 일어나는 모든 소욕이 간단( 間 斷 끊임)없이 투쟁하는데, 영육 투쟁의 고민은 우리 인간 이면 누구나 다 당하는 경험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영육 간의 투쟁의 견지에서 인간을 분류하면 다음 네 가지 종류 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 소욕의 사상이 육적 소욕의 사상을 완전히 지배하는 사람이겠고, 둘째는 영혼과 육신이 간단없이 싸우며 살아나가는 사람이겠고, 셋째는 육신이 영혼을 대개는 지배하여 살아나가는 사람이겠고, 넷째는 육신 이 영혼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육신이 영혼을 지배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심지어 영의 존재까지 부인하는 사람인데, 이 마지막의 종류를 가리켜 소위 유물주의라고 합니다.
여기 어떤 이가 있어서 도적질이나 음란이 나쁜 줄을 알면서도 육이 약 하여서 그런 범죄를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불가하거늘, 하물며 도적질이나 음란이 옳다고까지 주창한다면 이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 어이가 없어서 말 하려 해도 말할 수 없음을 이름,‘말이 안 됨’)입니다. 또 여기 어떤 국가가 있어서 약소국가를 압박할 때에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가면서 함도 불가한데, 하 물며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이 공공연하게 약소민족 압박을 당연하다고 주창하는 것에서는 세계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힘이 약하여 육의 지배를 받는 것도 불가한데 육신이 영의 존재까지 부정함에 이르면 그 인격이 여하한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 한 병자가 있어 아픈 줄을 알면 희망이 있으나 아무리 아파도 아픈 줄도 모르게 되면 이는 중병환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 서도 순복치 아니하여도 큰 죄인이거든, 하나님의 존재까지 부정함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여지조차 없는 중죄인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 위 유물사상의 정체입니다.
그러면 유물주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래 철학적으로 물질과 정신과의 관계에 대하여 3대 이론을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실재해 있는 것은 마 음, 혹은 정신이 전부라고 하는 유심론(唯心論)이고, 둘째는 실재해 있는 것 은 오직 물질뿐이라는 유물론(唯物論)이며, 셋째는 물질과 정신이 둘 다 실재하여 있다고 하는 현실론(現實論)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셋째 이론을 사 실대로 인정하는 자인데, 오늘 내가 말하려 하는 것은 정신의 존재를 부인 하는 유물주의라고 하는 사상입니다.
이 유물론은 물심(物心)의 분간을 무시하며 마음의 현상까지도 물질이 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에 치중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물리적(物理的), 생리적(生理的) 현상과 심리적(心理的) 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심리적 현상까지도 다 물질의 작용에 기인(起因)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영혼은 없고 우주에는 신이 없고 오직 자연법칙만 있으며, 인간 역사도 오직 물질의 관계뿐이라고 유물론은 말합니다. 따라서 이 유물론의 결론은 인간과 짐승과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과 목석(木石)의 분간 도 없게 됩니다.
만약 이렇다면 물질이 그 형태를 따라서‘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물질이 어떤 형식으로 모이면 목석도 되고 사람도 되고, 사람 중에도 공자(孔子)도 될 수 있고 도적도 될 수 있으며, 또 어떤 형태로 모이면 우익도 되고 공산당도 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의(意義)도 물질의 작용밖에는 찾아볼 곳이 없습니다. 렇게 인생을 본다면 인생의 목적이 없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또 우주에는 신이 없고 원자(原子)나 전자의 맹목적 활동으로서 태양계 가 생기고 지구가 생겼다고 한다면 인류의 도덕들은 파괴되어 정(正)과 사(邪), 의(義)와 불의(不義)의 차이는 없어지고, 선(善)과 허위(虛僞)의 분간도 없어져 인류는 그저 맹목적으로 본능적 충동으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일 것 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싸울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신약에 바울이 인용한“먹고 마시자. 내일 죽을 터이라.”의 생활 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유물사상입니다. 이것을 근본으로 한 사상은 인간 자체에서만 싸울 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도 나타나 일대의 세력을 가지고 싸우는데, 근대에는 이 사상이 공산주의라는 말을 타고 손에는 빵을 준다는 깃발을 들고 굶주린 대중을 삼키려는 것을 온 세계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세계의 청년들이 분명히 마음에 간직할 것은 사람이 과연 생각이 없는 짐승, 더 나아가 목석과도 차이가 없느냐? 그렇지 않으면 성경 말씀과 같이 하나님 독생자로 말미암은 새로 지음 받은 정신적 존재이냐?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함이 오늘 말하려는 사상전의 초점입니다.
유물론에 있어 그 이론의 착오는 명약관화하여 별로 반박할 필요는 없으나, 몇 가지 지적한다면 첫째, 의식(意識)에 대한 모순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할 것은 감각을 통 해서 들어오는 의식에서임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생각 의 재료가 감각에서 왔다고 할지라도 의식을 지도하는 자아(自我)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내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한다.’와 같이 내가 생각한다는 이 제일 분명한 지식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이 생각하는‘나’라는 존재, 이것은 분명히 물질이 아닌 존재입니다.
둘째로, 유물론의 모순은 이성(理性)에 대한 모순입니다. 이성은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데, 만약 고안(考案 설계나 도안)과 질서가 있는 이 우주가 원인도 없이 맹목적 물질로만 되었다면 우 리의 이성이 어찌 이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우주의 원 인인 하나님이 반드시 계셔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셋째로, 유물론은 과학적으로 연구할지라도 모순점을 알 수 있습니다. 관찰과 경험으로 보면 생명은 생명에서만 분파(分派)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물질에서 어떻게 생명이 생기겠습니까? 생물과 무생물과의 사이에는 넘을래야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물질, 즉 생명 없는 것이 생명 있는 것으로 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생명의 근원에서만 나오는데 그가 곧 하나님이십니다.
넷째로, 인간 역사는 과연 아무 목적이 없는 물질 조건에서 전개됩니까? 인류의 역사를 세밀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역사 가운데 어떤 도덕 법 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1세기에 바리새인과 사두 개인이 빌라도와 결탁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이 하나의 일만 본다면 선을 대표하는 예수는 악을 대표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실 패한 것 같습니다. 악이 선을 이기고, 사(邪)가 정(正)을 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말합니다. 예수는 영원한 승리를 얻었던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과 성삼문 등 사육신을 죽였지만, 수양의 죄악은 영원히 피를 뿌리고 사육신의 충절은 영원히 빛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무슨 까닭일까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역사가 찰스 비어드(Chales A. Beard)에게“당신이 역사를 연 구하여 얻은 것이 무엇이오?”물을 때 그는 다음 네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로, 역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떠한 것을 멸하려 하시 면 그것이 개인이건 국가이건 민족이건 막론하고 권세욕에 날뛰게 함을 알았노라고. 그러므로 권세욕에 날뛰는 개인이나 국가나 민족을 보면 벌써 망 할 때가 가까운 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는데 너무 천천히 돌아가 하나님의 맷돌이 있나 없나 의심하게까지 되지만, 하나님의 맷돌은 부드럽게 갈아 결국은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갈라내고야 마는 것을 알았습니다.
셋째는, 벌이 꽃에 가서 꿀을 도적해 오지만 그렇게 도적해 옴으로 말미암아 꽃에 열매를 맺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벌과 같은 강도가 항상 악을 행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로 말미암아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넷째는, 날이 점점 어두워질 때별을 볼 수 있는데, 암흑과 혼란이 길어 가면 이것이 다 지나가기 전에 벌써 소망의 별이 나타날 때가 된 것을 역사는 증명하더라고 말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만약 역사가 맹목적 물질 조건으로만 전개된다면 이렇게 되지 않겠으나,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정의의 맷돌을 가니 비록 천천히 돌아가나 부드럽게 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하나님의 맷돌이 너무 천천히 돌아가는 까닭에 의심할 때가 있으나, 하나님이 맷돌을 부단히 부드럽게 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륜은 이 인류 역사에 숨김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로마시대에 사람과 짐승을 싸우게 한 가장 악한 경기가 있었습니다. 가장 악한 죄수와 영악한 사자나 범과 싸우게 하여 어느 한 편이 죽을 때까지 그 참경을 구경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 가 처음 한 일은 이 처참한 경기를 없애게 하는 것이었으니 콘스탄틴 황제 가 믿음을 가지게 되자 그 때부터 사람과 짐승이 싸우는 경기는 역사에서 말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의 사람과 짐승의 참혹한 싸움은 오늘 우리의 마음에서 계속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각각 가슴에 손을 대고 내가 이 싸움의 승리자이냐, 아니냐, 내가 이 투쟁의 어느 편에서 싸우고 있느냐를 엄숙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신문1위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8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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