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03월 24일 故 한경직 목사
갈라디아서 6:11~18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다시 봉독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육체를 따라서, 혹은 육체에 속하는 것들을 자랑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였고, 날 때에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였고, 바리새파에 속하는 것을 자랑하는 이도 있었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랑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도 육체를 따라 자랑하려면 그들보다 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도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의 지파입니다. 바리새인이요, 율법을 지킴도 그들보다 손색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선언하십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육체에 속하는 것을 자랑하는 이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문벌을 자랑하고, 지위를 자랑하고, 학식을 자랑하고, 재주를 자랑하고, 기술을 자랑하고, 심지어 집이나 옷, 다이아몬드 반지를 자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바울도 당시에 이런 방면으로도 자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의 난 곳, 길리기아 다소에서 당시 최고 문화인 헬라 문화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유대 율법을 공부하였습니다. 특별히 당시의 모든 식민지 백성들의 선망이 되었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지금은 십자가에 대한 인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사실 바울 시대에 십자가라고 하면, 가장 악한 흉악범을 사형에 처하는 처형대로만 연상될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그때에 사도 바울이 친히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 되었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여기에 담대히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여기에서 '결코'란 말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보통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곧 결단코, 혹은 절대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여기에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하였습니까? 왜 나의 자랑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고 말하였습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이 갈라디아서신뿐 아니라, 그의 기록한 모든 서신이 그 이유를 설명하여 줍니다. 오늘 '나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뿐이라' 이 말씀을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도 이 십자가의 뜻을 좀더 깨달을 수 있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있는 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 대신 그의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증언하면서, 그러나 그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그의 말씀대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자기 몸을 버리셨다는 말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를 사랑하여 죽으셨다고 여기에서 말합니다. 곧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그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혹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물론 우주에 사무칩니다. 아침 햇볕과 저녁노을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빛납니다. 산천초목, 오곡백과, 자라나는 풀, 피는 꽃, 노래하는 새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풍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 어느 곳에, 역사상 어느 시점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빛나게 집중적으로 나타나십니다. 그것은 골고다 위, 우리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였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십자가 위에서 친구뿐이 아니고, 원수들까지도 위하여 그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워라 내 머리 주 앞에 조아려 하는 말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만민을 위한 주님의 사랑이 폭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그뿐 아닙니다. 실제로 기억할 것은, 이사야 53장 5절에 기록된 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을 입은 것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에 기록한 그대로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 위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죽으시므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곧 십자가는 전인류의 속죄소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만민의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흘린 그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찬송을 부릅니다. 혹은 지금 우리가 부른 대로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항상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친히 기록한 대로, 그는 본래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친히 생각한 대로,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도의 직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외칩니다. "내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온갖 더러운 죄를 씻어버리고, 깨끗한 사람을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뿐이 아닙니다. 일곱 귀신이 들린 막달라 마리아도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깨끗한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부정부패의 세리였던 삭개오도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깨끗한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아니, 같이 십자가에 달렸던 살인강도까지도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 낙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개인적으로도 인간 개조의 능력이 되었고, 또한 역사적으로도 사회 혁신의 도덕적 능력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이 변하여 성자가 될 수 있을까? 윤리적 강연으로 가능한가? 개인적 수양으로 가능한가? 국민 교육으로 가능한가? 강력한 무슨 법 제정으로 가능한가? 아닙니다. 죄인이 눈물을 흘리고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이올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나무 위에 높이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볼 때에는 독사에게 물린 병도 다 나은 것처럼, 아무리 악독한 죄의 병에 걸린 자라도 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받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18세기에 독일의 스톤벅이라고 하는 유명한 미술가 곧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회개한 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 아래에 이런 글을 썼다고 합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무엇 주느냐' 이런 글귀를 성화 아래 썼다고 합니다.
그 그림이 독일 뒤셀돌프 박물관 안에 걸려 있었는데, 하루는 독일의 한 귀족의 젊은 아들이 그 박물관에 들어와 구경을 하다가 이 그림 앞에 와서 오래 머물러 서서 그 그림을 주목하여 보고, 그 아래 쓴 글자를 읽었다고 합니다. 그 청년은 그때부터 온전히 변해서 귀족의 모든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그 일생을 피난민 구호와 복음전파에 바쳤습니다. 그가 곧 유명한 모라비아 교단의 창립자이기도 한 독일의 진젠돌프 백작입니다.
십자가의 위력이 이러합니다. 십자가의 감화의 힘이 이렇게 큽니다. 새 사람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외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그리고 넷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십자가는 사실 전인류의 소망이 됩니다.
왜? 모든 인간이 죄인인 까닭이므로. 물에 빠져 들어가는 이가 스스로 나올 수 있습니까? 누가 건져주어야 살죠. 중한 병에 걸린 환자가 스스로 고칠 수 있습니까? 어느 의사인가가 도와주어야 살죠. 전인류는 마치 물에 빠져 들어가는 이들과도 비슷합니다. 중한 환자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건지실 이는 오직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20세기는 과학, 지식, 기술, TV, 비행기, 자동차, 온갖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심은 나날이 악화됩니다. 도덕적 파탄 시대라고 하기보다도 발광시대에 직면하게 됩니다. 무도덕 시대라기보다도 반도덕 시대로, 흉악한 죄악의 구렁텅이로 나날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옛날 폼페이의 멸망 전야를 연상케 합니다.
어떻게 이 20세기 인간들이 그 죄에서 구원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십자가 위에서 죄를 소멸하실 이는 오직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이 암흑한 세계에 광명한 소망의 새벽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외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이러한 사도 바울에게는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합니다. 곧 사도 바울에게는 세상이라는 것, 세상의 향락, 세상의 정욕, 세상에 붙은 모든 것들은 십자가에 못 박힘이 되었습니다. 곧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빌립보서에는 이런 것들은 분토같이 버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 같은 이는 세상의 편에서 보면 죽은 것과 같습니다. 쓸데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그는 십자가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사랑하고, 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이 십자가를 전파하고, 이 십자가를 위하여 살고, 이 십자가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어떤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봅니까? 우리는 무엇을 자랑합니까? 전에 화란에 렘브란트라고 하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깊은 신앙에 들어간 후에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사람들 가운데 그 렘브란트 자신의 얼굴도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 자신도 그려 놓았습니다. 곧 렘브란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된 것은 자기의 죄도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 죄도, 내 죄도 속량했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다 이것을 깨닫습니까? '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신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느낍니까? 이런 얘기 들은 분들도 많으신 줄 압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술에 취해서 철도길에 가로 넘어져 낮잠을 잡니다. 그때 마침 급행열차가 옵니다. 어떻게 될까요? 죽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침 그때에 어떤 젊은 사람 몇 사람이 그 길로 지나가다 그 광경을 봅니다. 그 젊은 사람 몇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뛰어 들어가서 그 술 먹은 청년을 끌어서 철도길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뛰어나오다가 그만 불행하게도 미처 나오지 못해서 그 사람은 철도에 치어 죽었습니다.
그다음에 이 술 먹고 자던 청년이 내쳐지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눈을 번쩍 뜨고 보니 어떤 한 사람이 기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혼자 하는 말이, "이상하다. 난 술 먹고 철도길에서 잔 것 같은데, 그래도 난 살았는데, 저 사람은 왜 죽었을까?" 그 말을 듣던, 같이 가던 청년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분통이 터졌단 말이오. 그 술 취한 청년을 향해 하는 말이, "이 자식아! 저 사람이 왜 죽었는지 모르겠어? 너를 위해 죽었어. 너 같은 놈을 위해 죽었어." 오늘날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이 술 취한 청년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아 그 예수처럼 좋은 사람이!"
이 사순절에 십자가의 깊은 뜻을, 특별히 내 자신과의 관계를 좀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교신문1위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1366
'한국 교계 명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경직 목사 설교]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0) | 2023.02.21 |
---|---|
[한경직 목사 설교] 사도시대의 전도 (0) | 2023.02.21 |
[한경직 목사 설교] 기독 청년의 자세와 사명 (0) | 2023.02.20 |
[한경직 목사 설교] 도마의 의심과 신앙 (0) | 2023.02.20 |
[한경직 목사 설교] 오직 예수(종려주일) (0) | 2023.02.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