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교계 명설교

[조용기 목사 설교] 위로

by 크리스천투데이 일본지사 2023. 2. 10.
반응형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1~7)

 

반응형

 

<서론>


오늘 저는 “위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고 삶의 환경의 고난에 빠져 삶의 용기와 희망과 꿈을 잃어갈 때 우리가 재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로의 말이나 위로의 손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위로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어린아이들부터 청소년, 장년, 노년, 남녀 차별 없이 스트레스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중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헬라어로 “파라클레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위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파라’는 ‘~의 곁에’라는 말이고 ‘클레오’는 부르다는 말인 것입니다. 위로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곁에 부르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 위로는 하나님 곁에 나가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곁으로 부르셔서 위로하시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명사형인 ‘파라클레토스’는 성경에 예수님을 보혜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보혜사가 바로 파라클레토스 위로자라는 말인 것입니다. 성령도 파라클레토스, 보혜사, 위로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성령님 모두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돕는 자요 위로자요 변호자임을 나타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위로가 우리의 극심한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 있을 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혼자서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당해 살고 싶은 소망마저 끊어졌을 때, 세상과 마귀는 우리의 쓰러짐을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오늘도 성령을 통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기도해 주시며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시고, 그 받은 위로로 다른 고난당하는 사람을 능히 위로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위로는 언제나 상호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위로를 받으면 받을수록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위로 받는 것은 위로자가 되어서 고난당하는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는 우리 종교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종교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 종교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기독교를 믿습니다. 기독교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본론>
1. 사랑이 없는 종교

 

그러나 기독교가 사랑이 없는 종교, 위로가 없는 종교가 되면 하나님은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좋은 설교와 찬송이 있는 것은 좋습니다. 아~ 설교 참 잘한다. 찬송 참 아름답다. 그러나 마음에 상처투성이가 되고 피를 흘리면 교회 참석해서 조금도 위로받지 못하고 나간다면 그 설교와 찬송은 소리 나는 구리와 꾕과리에 불과하고 아무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심오한 신학과 학문을 설교하고 치료하는 역사를 베풀지 아니하면 그 설교가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장엄한 종교적 행사가 있어도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위로가 없으면 그 장엄한 행사는 무익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경에 그것을 뚜렷이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가 교회 와서 위대한 설교를 하고 방언의 은사를 활용하고 천사와 같이 말해도 사랑이 교회에 없고 얼음장 같이 냉랭하고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서 미래를 다 알고 모든 비밀을 알고 지식이 넘쳐나더라도 그렇지 않으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위로가 없고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는 종교적인 장엄한 행사를 할지라도 사람들이 위로받지 못하면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위로받지 못하고 상처 입은 몸에 피를 흘리고 왔다가 그대로 돌아간다면 그 교회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 와서 설교나 듣고 찬양이나 듣고 종교행사나 보고 나간다면 그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외로움과 좌절과 절망을 안고 와서 교회에서 위로를 받고 변화를 받고 힘을 얻고 생기와 용기를 얻어서 나갈 수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바로 그 위로의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 자체의 선함이 보혜사 위로자, 보혜사 성령께서 바로 위로자인데 위로자 예수님, 위로자 성령님이 계신 곳에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고 교회 왔다 갔다 한다면 무슨 교회 올 필요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보면 구약시대에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따라가고 아세라 신을 따라갈 때 바알 신 450명,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 850명을 갈멜산에 불러서 시합을 했습니다. 불로써 응답받은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섬기자. 그래서 그들에게 먼저 불로써 응답하도록 장작을 펴고 소를 잡아 얹어서 부르짖으라고 했습니다. 오전 내내 그들이 부르짖었으나 불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후에 소제 드릴 때 장작을 펼쳐 놓고 소를 잡아 얹어 놓고 물을 몇 동이를 부어 물이 철철 흐르게 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여 불로 응답하소서 하니 하늘에서 번갯불이 터지면서 장작불을 태워 번제가 다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고함을 칠 때 바알신을 섬기는 선지자들 다 잡아라. 450명을 다 잡으니까 엘리야가 그들을 시냇가로 끌고 가서 목을 다 베었습니다. 450명의 목을 베다니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그 나라에 엘리야가 기도하매 비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뛰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자기 숙소에 들어갔는데 얼마있지 않다가 소식이 왔습니다. 아합이 자기 아내 이사벨에게 당신이 데리고 온 선지자를 다 죽였다. 그러니 엘리야 때문에 이 나라에 당신이 데리고 온 선지자는 다 죽고 바알신은 사라졌다. 그러자 이세벨이 화를 내어서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내일 이 맘 때면 내가 네 목도 내가 베겠다. 그렇게 위대하던 엘리야가 그 말에 일어나서 집에서 혼쭐이 나서 도망을 치는데 광야로 하룻길을 도망을 쳐서 로뎀나무 앞에서 앉아서 하나님 앞에 이제 내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로 7절에 보면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야훼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야훼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여기에 보면 구약에 엘리야와 같이 위대한 선지자가 이후로 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선지자 하늘에 불이 내려오게 하고 3년 6개월 비가 안 오던 하늘에 기도하니까 비를 내리는 그런 선지자가 어떻게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공갈 한마디에 형편없이 도망을 치느냐. 과로를 해서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 위로의 말이 아니고 공갈 협박이 오니까 무너진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여러분 과로를 하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곳에 가서 설교할 때 우리 성도들의 전화와 편지에 큰 위로를 받는다고 하니까 한 사람이 굉장히 불만족한 질문을 해요. 아니, 조목사님 성령과 함께 동행하면서 무슨 여자 집사의 편지에 전화에 위로를 받습니까? 낙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천사도 아니고 평범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데 나도 위로가 필요하니 내게 화내는 당신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항상 우리는 다 위로를 받아야 되고 위로를 주어야 됩니다라고 그런 대답을 했습니다만 엘리야 같은 사람도 위로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가 낙심해서 로뎀나무 밑에서 이만하면 되었으니 내 생명을 거두소서. 탄식하고 장탄식을 하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낙심이 되어서 이제 나는 버림받았구나.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돌보아주지 않으시구나.

 

낙심될 때 정말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심한 짐을 걸머지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낙심하게 되고 고통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무엇이 필요하냐. 꾸짖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위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꾸짖었습니까? 아닙니다. 천사를 보내어서 어루만졌다고 했습니다. 어루만지는 말은 요사이 말로 말하면 마사지를 해주었다는 말입니다. 온 전신이 긴장되고 지치고 피곤하고 좌절되어 혼몽이 되어서 쓰러져 있는데 천사가 와서 마사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떡을 구워오고 물 한 병을 가지고 왔는데 천사가 구운 떡이니 얼마나 맛있겠습니까? 떡을 구우면서 이렇게 해서 먹이고 물을 마시고 그리고 또 쉬어라. 또 한잠 자는데 또 마사지 해주고 위로해 주고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고 정신을 차리니까 자 이 힘을 의지해서 호렙산에 가서 하나님을 기다려라. 길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으라. 40주 40야를 걸어서 호렙산을 걸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엘리야 같은 사람도 자기 죽이려는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서 호렙으로 가던 중 로뎀나무에서 위로를 받았는데 여러분이 위로를 받아야 될 자격이 있습니다. 위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2. 위로가 없는 가정


오늘날 우리가 가장 위기에 처한 것은 우리 가정에 위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부 이기주의가 너무 심해서 성경에는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고 하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짐을 다 맡겨 버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짐을 다 맡겨버리고 서로 위로해야 될 것인데 서로 상처를 너무나 많이 주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말로써 상처를 너무 많이 주고 남편은 아내를 너무 상처받도록 코너로 몰아치는 일이 많습니다. 성경에 골로새서 3장 18절로 19절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복종하라는 말은 섬기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잘 섬겨서 서비스를 하라. 천사가 엘리야를 마사지 해주듯이 잘 마음을 마사지 해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 참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지 않습니까? 살벌한 세상 속에 생존경쟁 속에 마음에 상처투성이를 입고 집에 오는데 마음의 상처를 긁어서 피를 흘리게 하면 견디지 못하지 않습니까? 위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오고 술을 먹고 오고 도박을 하고 세속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집에서 위로를 해주면 집에 빨리 들어오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내들이 해야 될 것은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면 섬기고 위로를 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위로보다도 또 집에 들어오면 또 마누라에게 혼나겠지? 또 잔소리를 어떻게 견뎌내나. 될 수 있으면 무슨 변명을 하더라도 늦게 들어가야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가정이 올바르게 되겠습니까?

 

아내는 아내대로 이 가정에서 수입도 적은데 삶을 살아가기에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편이 와서 격려와 힘을 주는 대신에 욕을 하고 폭력을 사용하고 흉을 잡고 압력을 가하면 마음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를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위로하지 않고 서로 상처를 입히게 되면 가정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이 근본적으로 부부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위로의 가정이 되어야 되는데 위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가정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또한 대화가 사라진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도 큰 문제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로 21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자녀들이 부모를 순종하지 않고 여러 면에서 부모를 대적하고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고 낙심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가까운 것이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있어 서로 위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뭘 어린 아이들이 위로가 필요하느냐. 어린 아이들이 오늘날 왕따를 당하고 교육에서 경쟁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많습니다. 부모님이 그것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자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또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고맙고 감사하고 어머니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집에 가면 아버지와 아들과 다투고 딸과 어머니가 싸우고 큰소리가 떠나지 않는 것이 오늘날 현실 사회인 것입니다. 서로 이해와 동정이 아니고 비평과 비난을 하기 때문에 위로가 없어서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 교육이 문제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인격이 없는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의범절, 규모있는 생활, 공중도덕, 윗사람 공경하는 윤리와 도덕적인 교육이 없고 그저 돈만 벌고 되고 성공만 하면 된다. 더 공부해라. 더 돈 벌어라. 더 성공해라. 압력을 가하니까 거기에 대한 스트레스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잠언서 13장 24절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자식을 징계하고 인격이 있는 교육을 시키며 잠언서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마땅히 할 의무와 윤리와 도덕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되는데 부모들은 밥만 먹이고 학교만 보내주면 되었다. 그 외에는 출세하라. 공부하라. 남보다 돈 많이 벌어라.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 이 세상에서 유익만 취하기 위해서 가르치고 인격을 가르치지 않는 인격 없는 교육이 오늘날 자녀들에게 큰 시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가 결국에는 고통당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로 5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일일이 다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부정적인 상황이 말세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로는 이러한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착실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위로 받아서 마음에 치료받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들도 딸도 다 세상에서 방탕하고 방향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3. 예수님도 필요하셨던 위로


예수님조차도 마음에 위로가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신데 무슨 위로가 필요하느냐.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으므로 사람이 필요한 음식이 필요했던 것처럼 위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에 얼마나 극심한 스트레스 받았는지 여러분들은 아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안 질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 나 십자가 못 지겠어요. 나는 그대로 천당에 올라가야 되겠습니다. 날 불러 주십시오. 그랬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지옥의 자식들이 다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혼자서 짓지 않은 자기의 죄를 다 자기가 짊어지고 책임을 져야 되니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큽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실 때 너희는 이 자리에 깨어서 기도하라. 그리고 돌 하나 던질 거리에 가서 엎드려 기도하는데 하나님이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로 옮기시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할 때 이마에 땀이 변하여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고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기에 땀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졌습니까? 그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깨어서 기도해달라고 하는데 기도하지 않고 잠이 들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이나 와 보니 잠이 들었으니 이제는 자라 이제는 끝이 왔다. 날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와서 날 잡으려고 한다고 해서 유다가 로마 군인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기도 하실 동안에 만일 아버지여 내가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이 고통을 못 참겠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 짊어지렵니다. 날 도로 불러 주십시오. 그랬으면 아버지가 도로 불러 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그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었느냐. 마리아의 헌신에 대한 사랑과 위로가 그 마음속에 힘이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일주일 전에 유월절 날에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서 대접받을 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나드 기름이라는 것은 옛날에 굉장히 비싼 향유인 것입니다. 처녀가 시집가기 전에 이 나드 기름을 준비해서 지참금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 나드 여기에 보니까 한 근은 3백 데나리온에 팔리는데 3백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노동자의 하루 노임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3백 데나리온이면 1년 내내 노동비로써 값을 주고 사야 되는 나드 한 근인 것입니다. 이것을 마리아는 시집가려고 준비했던 것을 옥합에 담아있던 그대로 가져와서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써 그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흠모와 헌신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위로를 받았습니다.

 

가룟유다가 크게 소리를 쳤습니다. 이 웬 허비인고? 이 삼백 데나리온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왜 이렇게 허비하느냐? 예수님께서 꾸짖지 마라. 마리아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 내 장례식을 위해서 미리 기름을 부었다. 이 말은 뭡니까? 장례식이란 십자가에 죽는 것이 예수님의 장례식인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 것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 미리 기름을 부어 주셨다는 것을 주님이 고백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기름 부으신 것이 예수님께 위로가 되어서 우리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고난을 참을 수가 있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위로가 큰 희생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는 남편은 가족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는 아내는 가정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하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는 국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하는 것입니다. 위로 받지 못하면 사람은 될 대로 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서 한없는 위로를 받아서 십자가에 장례 지낼 때 그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그 다음 마리아의 위로를 기억하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속에 위로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위로가 필요했는데 여러분과 나 같은 사람이 위로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위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위로가 없이는 생살로 그냥 이 세상에 대하면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걸머지게 한 마리아의 위로를 생각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십시다.

 

마가복음 14장 6절로 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주님이 죽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로한 사건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조용기 목사 입을 통해서 지금도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만큼 예수님을 위로한 것이 위대한 공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위로만 받을 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받은 그 위로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해 주어서 힘을 얻도록 해줘야 되겠습니다.

 

4. 교회는 위로와 희망의 처소

 

많은 사람이 교회 왔다가 어려운 고난을 당하면 마음에 상처입고 교회를 떠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지역장, 구역장이 심방해 주고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면 그 위로 때문에 다시 용기와 힘을 내서 하나님 교회에 열심을 다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위로와 희망의 처소인 것입니다.

 

교회와서 위로받지 못하고 희망을 얻지 못하면 다른데 가서 어디가서 위로받고 희망을 받습니까? 교회는 조직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술 극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죄인이 와서 변화를 받고 위로받는 곳이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 좌절과 절망 받은 사람이 희망을 얻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마음에 향기름을 붓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계시므로 성령은 위로자인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파라클레토스로서 돕기 위해서 곁에 와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7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와 함께 계신 보혜사 성령님, 우리 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은 위로자 성령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오면 위로를 받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계시는데 위로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성령 자체가 위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영이신데 그런데 교회 와서 위로받지 못하고 마음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왔다가 그대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교회가 잘못된 곳입니다.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고 마음에 치료받는 곳이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위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교회 예배를 필하고 돌아가실 때 마음이 훈훈하고 향기롭고 위로가 되지 못했다면 오늘 예배는 실패 본 예배인 것입니다. 오늘 제가 예배를 잘못 인도하게 된 것이라고 책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 파라클레토스 위로자가 우리와 같이 계신데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신 그 사람이 위로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로마서 8장 26절로 27절 한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이 여러분의 형편을 아시고 교회 오시면 여러분 아는 듯 모르는 듯 여러분 위해서 소리 내어서 혹은 소리 없이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성령의 간구를 아시고 위로의 능력을 베풀어서 여러분 마음을 위로하고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이 교회 와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기쁨이 충만하고 마음의 평안이 믿음 안에서 충만하게 해서 소망이 가득 차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교회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이런 것으로 채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빈 공간을 채워서 위로를 넘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기쁘고 즐거워야 돼요. 예수 믿는 사람이 기쁨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대속은 희망의 등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희망이 없으면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어디에서 희망을 얻습니까?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등대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에게는 용서의 등대를, 허물많은 사람에게는 거룩하고 성결을 얻는 등대를, 병든 자에게는 치료의 등대를, 저주받은 사람에게는 축복의 등대를,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희망의 등대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등대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길을 밝혀 주는 빛이요 구원이요 생명의 능력의 처소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로 7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살아갈 동안에 고난이 많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고난도 있고 사업과 생존경쟁의 고난도 있고 직장을 잃어버리거나 직장을 찾지 못해서 당하는 고난도 있고 멸시, 천대, 열등의식, 좌절감 고난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고난당한 것처럼 우리도 고난 많으나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는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는 힘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부정적인 사건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위로가 넘쳐서 여러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희망과 꿈이 가슴을 가득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비의 하나님이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 아버지시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고난 중에서 위로해 주시고 성령은 위로의 영이시고 온통 교회는 위로가 넘치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위로받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서 위로 받을 데가 없어요. 세상에 음악을 통해서 위로받을 수도 있고 좋은 예술을 통해서 위로받을 수 있지만 잠시 잠깐의 위로요, 마음의 항구적인 위로의 샘이 솟아오르는 곳은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 와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을 통하여 마음에 치료와 위로와 소망을 받고 나면 여러분 인생을 새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우리 마음이 치료받으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6~7) 위로가 있어야 고난을 견딜 수가 있다. 아무리 괴로워도 위로가 있고 희망이 있으면 참을 수가 있어요. 내일이면 좋은 일이 온다. 희망이 있고 위로가 있으면 오늘의 고난을 힘차게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지만 내일의 위로가 없고 희망이 없으면 오늘의 고난은 절망이 되고 죽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위로가 있어야 사는 것입니다.

 

시편 94편 18절로 19절에 “야훼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발이 미끄러지고 이제는 절단 났다. 이제는 희망이 없다. 그럴 때 주님께서 오셔서 안아주시고 우리에게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시니 우리는 주님 앞에서 끊임없이 용기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위대한 것은 이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리 아플 때 아스피린을 먹는 것처럼 잠 안 올 때 수면제 먹는 것처럼 마음이 고난스러울 때 성경을 읽으면 이 성경이 우리 마음속에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50절에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한번 따라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주의 말씀을 읽으면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이사야 49장 13절로 16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야훼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야훼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젖먹이는 아기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내 손에 새기고 있다. 나는 너를 위로하는 하나님이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위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위로를 받는 하나님의 교회는 날이 갈수록 성장발전 하지만 위로를 잃어버린 교회는 사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핍박을 많이 받아도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면 땅굴 속에 들어가서도 기도하고 핍박을 받아 죽어가면서도 배반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위로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교회가 텅텅 비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가 공동묘지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위로가 있으면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고 세상이 아무리 수고롭고 괴로워도 웃고 즐기면서 일해 나가고 책임을 걸머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가 없는데는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살아나갈 희망과 기쁨을 상실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과 교제도 또한 얼마나 위로에 필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람을 물고 찢고 싸우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위로해 주는 대신에 서로 허물을 자꾸 들춰내고 죄를 정죄하고 고통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뭐라 말했습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불어 끄지 않는다. 주님은 끝까지 살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성령을 받고 주님의 위로를 받았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해 줄 길을 열어야 하지 물고 찢고 싸워서 더 상처를 입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8절에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로 25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전도서 4장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렇게 서로 모여서 서로 위로하는 모임이 되어야지 서로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위로 하십시다. 내가 위로받은 만큼 위로하면 더 위로가 더 넘쳐나는 것입니다. 서로 힘을 주고 용기와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의 교제가 왜 필요하냐면 위로를 해주고 위로를 받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서로 물고 찢으면 망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성도가 서로 모여서 서로 사랑의 위로를 해주면 점점 더 왕성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엔 위로 받지 않고 살 만큼 가득한 사람도, 위로하지 못할 만큼 비어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위로하며 위로 받으며 살아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마음 무거운 날 전철 안에서 아이의 방긋방긋 웃는 웃음만 봐도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아~ 어린아이 참 이쁘다.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슬픔은 위로에 의해 작아지고 위로의 힘으로 우리는 고난의 강을 건널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사야 40장 1절에 한번 따라 읽으십시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환난을 당해서 위로받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다른 환난을 당해서 고난당한 사람에게 위로해 주라고 내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은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의 간증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 받지 않은 사람의 간증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스스로 고난을 당하고 위로를 받은 체험이 있으면 그 체험을 나눌 때 많은 사람이 큰 힘을 얻고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가장 많이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근심 걱정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많은 환난과 고통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 위로와 경험을 통하여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말이 상대방을 위로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여 나는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슬픔을 당하고 어두움을 겪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할 것입니다. 네가 감당할 수 있지 않느냐. 너는 그만큼 샘이 차고 오래 믿었기 때문에 내 백성을 위로할 수 있는 위로자가 될 수 있는 훈련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 네가 이 고통을 견디는 체험을 하고 난 다음에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내가 그렇게 한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하신 것은 여러분 자신이 구원받고 은혜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이끌어주고 인도해주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고 체험을 하고 난 다음에 여러분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걸머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걸머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위로가 필요하셨습니다. 세상에 계실 때에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고, 십자가를 홀로 지셔야 했던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위로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독한 사람, 죽어 가는 사람에게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여러분만이 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상처투성이인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나 상처가 쌓이고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웃으나 속으로는 피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마음을 열어보면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쌓여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위로의 근원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 위로의 근원을 알고 있고 그 위로의 하나님과 같이 계시고 여러분이 입을 열어 그 하나님을 증거하므로 상대방을 치료하고 고쳐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세상에 우연히 왔다 우연히 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결론>
위로가 없이는 살벌해진 세상에 살아갈 수 없는데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위로를 가지고 세상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려고 오늘날 부르신 것입니다. 위로가 없으면 더 많은 폭력이 일어나고 더 많은 살인이 일어나고 더 많은 자살이 일어나고 더 많은 고통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위로가 없으면 극단적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살 희망이 없으니까 자살하지요. 이 세상에 겁난 것이 없으니까 폭력을 행하지요. 좌절과 절망하지요. 위로가 있으면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위로받아야 되고 또 위로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이냐, 위로하는 처소, 위로받는 처소가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 왔으니까 위로 받아야 되요. 또 성령께서 계시니까 위로가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여러분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처소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로하는 아버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느 곳이냐. 위로받고 희망을 얻는 곳이 교회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1~5) 이 위로의 처소가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상처입기 위해서 교회로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심판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허물을 들춰내기 위해서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을 벗기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입히기 위해서 덮어주기 위해서 허물을 사하기 위해서 변화시키기 위해서 위로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열심히 오십시오. 교회 와서 위로받기를 원하십시오. 위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희망을 달라고 부르짖으십시오. 반드시 희망을 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희망과 위로를 가슴에 가득히 안고 가면 집안이 화평해지는 것입니다. 회사가 좋아지고 분위기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영광스러운 분위기를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위로가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고개숙여 기도하겠습니다.

 

/ 2012. 12. 30. 주일설교

 

종교신문1위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60434

 

[조용기 목사 설교] 위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www.christiantoday.co.kr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