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2월 2일
본문: 갈라디아서 5:7~12
설교: 이수영 목사
제목: 십자가, 구원의 진리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운동경기장에서의 경기 특히 경주에 비유했습니다. 달리기 경기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운동선수들은 최대한 곧게 경주선을 따라 달려야 합니다. 비뚤비뚤 달리면 좋은 기록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기록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경주선이 정해진 출발점에서 도착지점까지 최단거리여야 하고 그 경주선 안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야 합니다. 장애물경주가 아닌 이상 경주선 안에 어떤 장애물을 설치한다거나 경주선을 엉뚱한 방향으로 그려놓는 것은 정신병자 아니면 어떤 나쁜 의도를 가진 자나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그에게서 복음을 전해 받은 신자들이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곧바로 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믿음의 경주를 곧바로 달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곤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 여러 교회의 신자들이 처음에는 오직 참된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을 떠난 후 그곳 신자들에게 그릇된 권면을 함으로써 그들이 믿음의 경주를 바르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한 것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 경주의 방해자들의 권면이란 다름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어야 한다는 권면이며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권면이었습니다.
그런 권면이 잘못된 것임을 사도 바울은 이미 수없이 반복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권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에서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너희" 즉 갈라디아 교인들을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난 것"이란 복음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면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과는 다른 소리이며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가서는 결단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쓰며 머리 부분의 인사말을 끝내자마자 제일 먼저 그것을 단호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갈1:6-9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복음이라고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자들이라고 말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전한 복음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1:11-12를 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도 바울은 설령 자기가 전한 복음 외의 다른 것을 전하는 자들을 거침없이 저주하는 말이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갈1:10에서 쓰기를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한 말입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가르침은 교인들 사이에 퍼지지 않도록 단호하게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가르침일수록 누룩처럼 잘 퍼지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의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한 사도 바울의 말은 그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도 바울의 확신은 그로 하여금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게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오염시키며 흔들 자들이 나타나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했지만 그들이 결코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흔들리는 갈라디아 지방 교회들의 상황을 돌려놓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었지만 그 성공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한 하나님 자신의 역사로 인한 것이라는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확신을 드러내는 것이 본문 10절의 글입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당신의 백성의 마음을 지켜주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요동하게 하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임을 또한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와,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마음을 품고 딴 길로 가지 않을 것이며 율법주의자들은 심판을 받으리라는 확신은 그 자신의 믿음과 그의 사역 또한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사울은 열렬한 유대교의 수호자였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열렬한 유대교의 수호자였던 것만큼 또한 맹렬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된 이후의 바울은 복음에로 나아온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역설해왔고 그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박해 때문에 할례에 대한 그의 입장을 바꿀 뜻이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로 돌아가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에서 그는 쓰기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합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여전히 할례를 전한다면 유대인들로부터 오는 박해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할례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 할례를 전한다면 평안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하여 은혜로 얻은 구원을 버리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왜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이 다른 편지에서 쓴 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쓰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전1:23)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아 살게 되었다고 증언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그 주장과 부딪쳐서 그냥 아무 문제없는 듯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걸림돌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0-33) 이 말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을 따라간 이방인들은 의를 얻은 데 반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가 없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그와 그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돌에 부딪쳤다는 것입니다. 그 부딪치는 돌,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돌인 것입니다. 그 구원의 돌은 제거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이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입니다.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표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부인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의 길을 똑바로 달려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목표점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잘못된 경주선을 따라 달리라고 권면하거나 바른 경주선 위에 장애물을 쌓아놓는 행위는 저주받아 마땅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 마지막 절의 다소 과격하고 거칠게 들릴 수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제거되어야 할 것은 "십자가의 걸림돌"이 아니라 할례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베어 버린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말은 스스로 목을 벤다거나 할복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자신의 생식기관을 스스로 손상시키는 행위를 뜻합니다. 스스로 거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할례가 논쟁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어지럽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구원의 진리를 저버리게 하는 자들의 위험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교회로부터 없어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와 연관시켜 신23:1의 말씀을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생식기관이 손상된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기 때문입니다. 생식기관에 손상이 있는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 율법이 명시하는 바이기에 사도 바울은 그 율법에 의거해서 할례 문제로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교회로부터 제거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할례를 그토록 좋아한다면 그들 자신은 생식기의 포피만 아니라 보다 철저하게 아예 생식기 전체를 베어버리기를 바란다는 심한 야유조의 말을 하게되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실제로 그들이 스스로 거세하기를 바랐다기보다는 그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깨달음을 새롭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복음이고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받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도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들릴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더더욱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모든 지혜를 무한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거룩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시며 모든 세상의 지혜를 무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풍성하신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열어주신 구원의 문인 것입니다. 그저 그 문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그 문으로 안 들어오면 영원히 후회하며 고통 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이 복음의 길을 지금까지 걸어왔습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판단과 결단과 선택에 따른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오직 은밀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믿음의 길에 들어와서 장애물을 설치하거나 다른 길로 갈 것을 권면하는 자들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사탄의 장난입니다. 특히 한국교회에는 온갖 이단들이 다양한 가면을 쓰고 활개 치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가 아닌 다른 이야기나 성경말씀 전체의 가르침에 일치하지 않는 파편적인 주장을 펼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게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유일한 구원의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참되고 선한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수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종교신문1위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7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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