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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테크닉

[아트설교연구원 설교] 고난은 기쁨의 전주곡이다

by 크리스천투데이 일본지사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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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베드로전서 1장 3-9절

▲ⓒ픽사베이

본지는 아트설교연구원 연구원들의 서평과 원장 김도인 목사의 설교 글쓰기 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들의 연구 결과물, 즉 설교문을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설교문을 공개합니다. 먼저 원장 김도인 목사의 베드로전서 설교를 연속 게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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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은 감동이 있다

 

‘좋은 것!’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사람들은 성형을 한다. 다른 사람에게 예쁜 사람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운동을 한다. 다른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사람은 환영받는다. 나쁜 사람은 환영 대신 배척을 받는다. 사람들은 환영받는 사람을 좋아한다.

 

좋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그리스도인은 감동을 주는 사람이다. 세상에 하나님의 감동을 주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은 ‘뒷맛’이 좋다

 

‘좋은 사람!’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싶다.

좋은 사람은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선을 행하면 유익을 준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사람이다. 좋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딸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은 선을 행한다. 좋은 사람인 그리스도인은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을 행함이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4)”.

그리스도인은 선이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 단 조건이 있다. 그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악의 특징이 있다. ‘뒷맛’이 찝찝하다. 반면, 선의 특징이 있다. ‘뒷맛’이 좋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도 선은 ‘뒷맛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선이란 뒷맛이 좋은 것이다. 악이란 뒷맛이 개운치 않는 것이다.”

선은 뒷맛이 좋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뒷맛이 좋은 선을 행하며 살아야 마땅하다.

 

‘뒤끝이 있는 사람’과 ‘뒤끝이 없는 사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뒤끝이 있는 사람’과 ‘뒤끝이 없는 사람’이다. 종종 이런 말을 한다.

‘뒤끝 있네!’

뒤끝이 좋지 않다는 말이다. 뒤끝 있다는 것은 ‘뒷맛’이 좋지 않은 사람이다.

저는 장에 염증이 있어, 화장실만 다녀오면 뒤끝이 안 좋다. 대부분 찜찜하다. 최근 일본이 하는 행태는 뒤끝이 아주 안 좋다. 절대 과거의 만행을 사과하지 않는다. 이웃 나라인 한국에 불쾌한 뒤끝만 보여주고 있다. 뒤끝은 사람을 찝찝하게 만든다.

사람은 뒤끝이 없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뒤끝이 없어야 한다. 도리어 뒷맛이 좋아야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 뒷맛이 불쾌하다. 앞에서는 정의로운 사람인 척한다. 뒤에서는 불의의 앞잡이가 된다.

사사기는 사람의 특성이 악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뒷맛이 꾸리꾸리하다. 사사기는 인간의 좋지 않은 뒷맛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하나님이 없는 곳은 뒷맛이 좋지 않다.

요나도 뒷맛이 좋지 않은 선지자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요나는 다시스로 갔다. 요나가 보여준 뒷맛은 하나님께 불쾌함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뒤끝이 없으시다. 요나를 큰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해 내신다. 그런 다음 기회까지 주신다. 요나에게 다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뒤끝이 아니라 뒷맛이 좋으신 분이시다.

세상 최고로 뒷맛 좋은 분은 예수님이시다. 떠난 배신자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셨다. 다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최고의 뒷맛은 십자가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하실 수 있나? 뒤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뒤끝이 없는 사람이다.

 

두 종류의 고난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있다. 고난이다. 고난은 뒷맛이 안 좋기 때문이다.

고난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받는 고난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고난이다.

‘세상으로부터 받는 고난!’은 고난은 뒷맛이 안 좋다. 고난이 연속되기 때문이다.

제 인생을 돌아봐도 그렇다. 열 번 중 기쁨은 한두 번이다. 나머지는 고난과 슬픔이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윗은 13년간 사울로부터 도망을 다녔다.

요셉은 더 심했다. 형들로부터 버림받았다.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감옥에 들어가서도 고난이 그칠 줄 몰랐다. 이런 긴 세월의 고난으로 인해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세상의 고난은 끝이 없다. 뒷맛이 찜찜하다.

반면 ‘하나님 안에서의 고난!’은 뒷맛이 좋다. 고난으로 그치지 않고 기쁨의 전주곡이 울려 퍼진다. 오늘 사도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뒷맛이 좋다!’

고난의 뒷맛이 좋은 이유가 있다. 고난이 기쁨의 전주곡이기 때문이다. 고난이 기쁨의 전주곡임을 경험한 베드로는 교인들에게 고난의 마지막은 찬송이라고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한다(3절).”

고난의 마지막은 찬송이다. 그 이유는 명료하다. 부활로 산 소망(3절)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의 여정에 하나님의 도우심(9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 안에서 고난을 받는다. 이 고난은 고난으로 그치지 않는다. 고난이 기쁨의 전주곡으로 이어진다. 고난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절호의 기회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마다 뒷맛이 좋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온 것은 고난도 뒷맛이 좋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고난의 뒷맛을 좋게 해주시니 하나님을 찬송한다(3절). 하나님은 십자가로 그치지 않으셨다. 부활로 나아가셨다. 그 결과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유업을 잇게 해주신다(4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게 해주셨다(5절).

베드로는 오늘 말씀을 통해 기쁨의 전주곡인 ‘시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험이 시험으로 그치지 않는다. 시험이 ‘기쁨’으로 마친다. 그냥 기쁨이 아니라 큰 기쁨으로 종결된다. 그것이 6절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6절)”.

‘당연한’ 시험으로 그치지 않는다. ‘도리어’로 바뀐다. 바뀌니 시험이 ‘기쁨’이 된다.

 

고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전주곡이다

 

며칠 전 한 분을 만났다. 그는 자기 인생이 시험으로 점철되어, 삶이 무척 힘들다고 말했다. 아직도 시험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니, 아직도 멀었단다.

저는 그분의 말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곧,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바꾸어주실 것이다.’

이는 그분의 고난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전주곡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저도 그랬다. 저는 인생의 90% 이상 기간에 몸이 아팠다. 육체의 아픔은 결혼하면 그칠 줄 알았다. 교회 사역을 열심히 하면 멈출 줄 알았다. 그러나 더욱 심해졌다. 부목사로 사역할 때는 허리가 너무 아파 밤에 화장실을 갈 때 기어서 다녔다.

육체의 고통은 50대 후반이 되어 멈췄다. 과거의 극심한 고통이 지금은 기쁨의 전주곡으로 바뀌었다. 이젠 남들이 자주 걸리는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저의 고난은 임현수 목사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그는 2015년 1월 북한에서 갑자기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7년 8월 9일까지 949일 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다. 134번의 독방 주일 예배, 3000끼의 ‘혼밥’을 먹었다.

그가 잡힌 것은 “김일성 대신 하나님을, 김정일 대신 예수님을 믿고, 당(黨) 대신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설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극한 고통은 기쁨의 전주곡이었다. 그는 북한의 감옥을 통해 하루 단위로 사는 법을 배웠다. 영적인 삶의 중요성과 성경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북한 주민들의 참혹한 삶을 몸소 체득했다.

그가 북한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은 뒤 한 고백이 있다. “노동교화소는 하나님이 내게 마련해 주신 수도원이었다.”

임현수 목사에게는 북한의 감옥이 영적 수련을 받는 최상의 교육 기간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광야였다. 기쁨의 전주곡을 위한 광야였을 뿐이다.

베드로도 동일하게 고백한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박해가 극심했다. 고난이 그칠 줄 몰랐다. 박해와 고난을 견딘 것은 악이나 깡이 아니었다. 믿음이었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버텼다. 베드로가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9절이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박해와 고난 가운데 믿음을 지켰다. 그 결과 기쁨의 전주곡이 울려 퍼졌다. 구원으로 이어졌다.

 

하나님의 팡파르가 울려퍼진다

 

전주곡을 지나면 울리는 것이 있다. 축제의 한마당인 ‘팡파르(Fanfare)’다. 팡파르는 큰북, 트럼펫 등으로 연주하는 화려하고 씩씩한 짧은 악곡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결국 축제의 팡파르가 된다. 세상의 팡파르가 아니라 하나님의 팡파르가 울려 퍼진다. 이는 영광의 팡파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고난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의 팡파르다.

지금 시험과 고난을 받고 있는가?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기 위한 전주곡이다. 마치 유대 격언처럼 금이 제련소에 제련되는 순간 빛난 금이 되는 것과 같다.

유대 격언에 ‘금과 은은 불 속에서 정련되어야 비로소 빛이 난다’고 한다. 스토아 철학자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불은 황금을 시험하고, 역경은 강한 사람을 시험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된다. ‘기쁨의 전주곡’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의 팡파르가 울려퍼짐을 기대해야 한다. 오늘 베드로는 불 시험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

그 이유는 고난이 하나님께 영광의 팡파르를 울려 퍼지게 하는 절호의 찬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난을 통과한 사람이 있다. 바로 욥이다. 욥은 하나님의 영광의 팡파르를 울려 퍼지게 했다. 이는 그가 고백한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겪고 싶지 않은 고난을 겪는다. 그때마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다. 하나님께서 울려주실 팡파르를 기대하는 것이다.

신부인 까를로 까레또(Carlo Carretto)가 이런 말을 했다. “나날의 생활 속에 광야를 마련해라”.

나날의 생활 속에 광야를 마련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팡파르가 울려퍼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광의 팡파르를 울려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생활 속에 광야를 마련해야 한다. 그 이유는 고난이 지나면 기쁨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문학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이런 말을 했다. “고통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고난이 지나면 반드시 기쁨이 스며든다.”

고통이 지나면 반드시 기쁨이 스며든다. 즉, 하나님의 팡파르가 울려 퍼진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고난을 보지 않고 다가올 기쁨의 팡파르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무치게 사랑하라

 

안도현 시인은 ‘사무침’이란 단어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대의 가슴속에 맺히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무엇으로 맺히는가. 흔적.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맺힘. 바로, 사무침이다.”

사무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오랫동안 꿈속에 품고 살아간다. 마침내 그 꿈을 실현한다.

20세기 프랑스 소설가인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가 한 말이 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사무침을 삶에서 실현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백범 김구다. 백범은 국모가 시해 당한 것이 마음에 사무쳤다. 그는 치하포에서 왜인을 발견하자 먼저 공격해 살해했다. 재판이 열리자 역사적인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놈!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국가 간 통상, 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왕후를 살해하라고 나왔다더냐? 이 개같은 왜적 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으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이 강토를 더럽힌 왜놈들은 씨도남기지 아니하고 다 죽여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리라!”

사무친 사람은 무서움이 없다. 왜인에 대해 마음에 사무쳤던 당시 백범이 통렬하게 꾸짖는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무침을 해결하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 고난을 당할 때도 취할 자세가 달라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무침을 가져야 한다.

원한이 아니라 기쁨의 전주곡의 사무침이 넘쳐야 한다. 아는 하나님 영광의 팡파르의 사무침이어야 한다. 그럼 고난은 고통이 아니다. 기쁨의 전주곡이 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하나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면 된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이미 기쁨의 전주곡이 울리는 것이다.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

 

종교신문1위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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