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설교연구원 설교] 실패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본문: 누가복음 22장 54-62절
꿈을 포기하고 싶을 때
‘꿈을 포기하고 싶을 때’라는 글에 보면 짤막짤막하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몇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20년 넘게 글을 쓰면서도 평론가들로부터 “너저분한 잡동사니 같은 글만 쓴다”는 비판을 받았던 작가의 이름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2. 신용호는 한국의 저명인사 99명으로부터 “당신이 하려는 사업은 무조건 실패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이 ‘안 된다’고 했던 사업은 ‘교보생명’이었다. 신용호는 교보그룹 창업자다.
3. NBA 시절 9,000번의 슛을 실패하고 300번의 경기에서 패배하고, 동점골을 깨라는 기회가 주어진 게 26차례였지만 그것을 모두 실패한 선수의 이름은 마이클 조던이다.
4. 빈민가에서 남들이 먹다 버린 빵을 주워 먹던 한 청년은 디즈니랜드를 설립한다. 그의 이름은 월트 디즈니다.
5. 근육 무력증에 걸려 5년 가까이 누워서 지내던 박성수는 이랜드를 창업한다.
6. 끝도 보이지 않는 가난에 절망한 나머지 독약을 마신 남생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중국 음식점 ‘하림각’의 사장이 된다.
7. 신춘문예에 탈락에 이어 출판사에 직접 투고한 원고까지 거절당한 아픔을 겪은 한 청년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다. 그의 이름은 이문열이다.
실패를 통해 배우지 못함이 부끄러운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분들이 이런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세상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실패를 경험한다면 실패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배우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실패를 경험한다면, 실패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실패하면 실패하는 그 순간뿐 아니라 어느 정도 기간은 정말 힘들 수 있습니다.
실패를 했을 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면 하면 부정적인 감정도 사라집니다.
실패는 더 배우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모든 실패에는 어김없이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교훈을 잘 배우면 실패 수업은 곧 끝나지만, 교훈을 못 배우면 실패 수업은 계속해서 되풀이 됩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을 보십시오. 기어다니다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이들은 일어선 횟수보다 더 많이 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제대로 걷기 전까지 걸음마를 배우면서 몇 번이나 넘어지는 지 아십니까? 약 3천 번 정도 넘어진다고 합니다. 3천 번이나 넘어지는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울기도 하지만, 얼른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걷고 싶은 욕구와 새롭게 세상을 탐구하려는 욕구 때문에,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이는 계속해서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정신을 계속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이쿠, 넘어졌네. 이제 걷는 연습을 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어른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실패한 후 크게 낙심합니다. 넘어진 후에 다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한번 잘못되었을 뿐인데도 항상 잘못될 거라고 비관하면서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시 걸음마를 배우든 그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넘어져도 다시 훌훌 털고 일어서는 어린아이의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 의해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옆에서 같이 동행하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만이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주님과 함께 기꺼이 죽겠다고 한 베드로는 멀찍이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을 하고 맙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면서까지 주님을 부인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한 베드로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것일까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고 죽는 것이 베드로의 마땅한 자세 아닐까요? 이 사건을 보면 베드로는 한 마디로 실패한 수제자였습니다.
거짓말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땅에 가뭄에 들어 아브라함은 애굽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애굽 땅에 들어가면서 아내 사라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애굽 땅에서 들어가서는 나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거짓말은 단지 심적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거짓말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만일 그 누군가가 실제로 사라를 달라고 하면 주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일평생 사랑해 오던 아내를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아내를 버리겠다는 이런 사람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있는 것일까요?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아브라함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을 저지릅니다.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갔을 때도 동일한 일을 저지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우리는 이들을 본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은 이 실패를 기회 삼아, 다시 일어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경험하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실패의 과정을 통해 하나밖에 없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셨을 때 두말없이 순종함으로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게 됩니다.
실패를 통해 깨달아야 한다
지금까지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지금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실패는 내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때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깨달았다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38살 때 지난번 교회에 처음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38살에 담임목사로 부임한다는 것은 그래도 흔하게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교만해졌습니다. 목에 힘도 좀 들어가고, 좀 잘나가는 목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제가 그 교회 위임 투표에서 떨어졌습니다. 위임투표에서 떨어지니 머리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자존심도 너무 상했습니다.
그러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교회를 사임해야 되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정말 많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만일 그 교회에서 위임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니 너무 끔찍한 것입니다. 제가 그 교회에서 위임되었다면, 아름다운교회에서 위임목사로 설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실패를 통해 제가 얼마나 교만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부족한 목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저를 아름다운교회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때의 실패를 제가 단지 실패로 여기고 그 실패를 통해 제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다면, 또한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고, 불평과 원망으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과정이다
실패는 성공의 과정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 실패인데도, 그 과정을 도외시합니다. 그런 과정 없이 곧바로 성공으로 가길 원하지만, 그런 성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실패의 길을 통해서만 성공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한국 최고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이어령 선생님이십니다. 먼저 고인이 된 딸 이민아 목사님을 통해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이십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첫째 아들 이승무 씨는 영화감독입니다. 선생님이 아들에게 연하장을 보내면서 이런 말을 썼다고 합니다. “너는 실패해도 성공했다.”
이어령 선생님은 어떻게 “실패해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동안 아들의 실패에서 이미 성공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고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통해서만 성공에 다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성공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이 아니라, 또 다른 말입니다. 실패 없는 성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가 실패 없는 성공을 원한다면, 가시 없는 장미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시 없는 장미는 장미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장미는 가시가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차사순 할머니의 ‘960번’의 도전
미국 유력 일간지 ‘시카고 트리뷴’은 2010년 11월 25일자 사설에서 960번의 도전 끝에 운전면허증을 획득한 우리나라 차사순 할머니를 사진과 함께 기사화해 눈길을 끈 적이 있습니다.
차사순 할머니의 끝없는 도전 정신을 높이 평가한 ‘960번’이라는 제목의 사설은 이렇습니다. “아이들에게 도전 정신을 가르치고 싶다면, 차 할머니의 사진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놓아라. 아이들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960번의 실패 끝에 운전면허를 따낸 올해 69세 된 한국의 할머니라고 말하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960번이나 도전할 수 있었을 까요? 그것도 운전면허증을 따는데 말입니다.
차사순 할머니가 960번이나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실패가 성공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생 전체를 바라보면, 실패나 성공이나 인생의 어느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인생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차사순 할머니는 실패라는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열심히 사랑하신 것입니다. 실패한 내 인생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실패했다 말해도,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한 게 아니라, 실행되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인생은 신호등이다
우리가 도로에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신호등입니다. 건널목에서는 우리는 녹색불이 켜지면 건너가고, 빨간불이 켜져 있으면 녹색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가야 하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사람은 빨간불이 켜져 있다 해서 그곳으로 갈 수 없다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빨간불이 녹색불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인생의 도로를 갈 때, 항상 파란 불만 켜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삶’이라고 이름지어진 길을 꾸준히 걸어가고 있지만, 항상 잘 닦여진 도로에서 파란 신호만을 받으면서 가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이하게 되는 시련과 실패를 단지 빨간불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빨간불이 녹색불로 바뀌는 시간 동안만 참고 기다리면, 다시 앞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삶은 계속 쉬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걷다가 잠시 쉬고 또 다시 걷기를 반복하는 녹색불과 빨간불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메리 빅포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패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는 빨간불 앞에 계속 머무르고 있거나 뒤돌아서지 않는 한, 언젠가는 꼭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를 바라보는 주님의 눈빛
본문에 참 가슴 아픈 장면이 나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1-62)”.
베드로가 세 번째 주님을 부인하는 순간, 주님이 베드로를 돌아보셨습니다. 주님의 눈빛과 베드로의 눈빛이 마주쳤습니다.
주님의 눈빛과 베드로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베드로는 어떤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순간 얼음이 되었습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죽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주님께서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순간 확 떠올랐습니다. 베드로는 다리가 떨려 그 자리에서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북받치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밖으로 뛰어나가 목 놓아 통곡을 합니다. 눈이 퉁퉁 붓도록 그 거친 사나이가 울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하셨는데, 베드로를 바라보는 주님의 눈빛은 어떤 눈빛이었을까요? ‘그래,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한다니까 큰 소리 치면서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우기더니 꼴 좋다. 수제자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너도 나를 모른다고 했으니, 이제 나도 너를 모른다. 이제 너는 나와 상관없다.’
예수님께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베드로를 화난 얼굴로 쳐다보셨을까요?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긍휼과 측은함의 눈빛으로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괜찮다는 것을 눈빛으로 말씀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실패를 통해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더 귀한 제자로 쓰임 받을 것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실패했을 때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우리가 실패했을 때도 똑같이 바라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실패를 통해 더 나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이 우리 주님이라는 것이 저는 너무 좋습니다.
계속해서 도전하라
실패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계속해서 주저앉지 않고 차사순 할머니처럼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말에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말이 있습니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사람은 장맛을 볼 수 없습니다.
인류 최초의 달 착륙선인 아폴로 11호에 탑승할 우주비행사를 뽑을 때 미국항공우주국에서는 “실패했던 사람 우대합니다”라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왜 이런 조건을 내 걸었을까요? 우주여행이라는 불확실성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라는 과학적인 판단 때문입니다.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자의 교만보다, 실패를 경험한 자의 겸손과 자기 성찰이 인류가 달의 표면에 첫발을 내딛는데 가장 필요한 요소라고 여긴 것입니다.
조앤 롤링 이야기
아이들이 좋아하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는 조앤 롤링입니다. 롤링의 남편은 딸을 낳은지 4개월 만에 무책임하게 그녀 곁을 떠나가 버립니다. 어린 딸을 데리고는 회사에 취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1년 동안이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주 정부에서 주는 생활 보조금으로 겨우겨우 살림을 꾸려갔습니다. 삶을 포기할 생각으로 수면제를 집어들기도 했지만, 그 순간 목 놓아 울어대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립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가 가장 잘 하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고민하는 가운데,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짓고 공상하기를 좋아했던 버릇이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필기도구와 공책을 사 지독한 가난을 견디며 1년 동안 열심히 글 쓰는 것에만 집중을 했습니다. 그 때 쓴 글이 바로 <해리포터>입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현재 전 세계 7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4억 5천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셰익스피어와 비틀스에 이어 영국 문화 영웅의 계보를 잇는 문화인으로서 대영제국 훈장을 받는 명예도 얻었습니다.
조앤 롤링이 한번은 하버드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축사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버드를 졸업한다는 사실에서, 저는 여러분이 실패하는데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 못지 않게 여러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요인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공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실패에 대한 공포가 당신의 삶을 좌우할 것입니다.
인생에서의 실패는 피할 수 없습니다. 실패 없이는 진정한 자신도, 진짜 친구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재능이고, 그 어떤 자격증보다 가치 있는 것입니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 시도도 하지 않는다면, 실패한 것이 없어도 그 삶 자체가 실패입니다.”
3할만 살아도 성공한 인생이다
카피라이터인 정철 씨의 <머리를 구하라>에 보면, ‘10할은 없다’라는 글이 나옵니다.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자세가 바로 이러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철 씨는 3할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말합니다. 3할이 무슨 뜻입니까? 야구를 예로 설명하자면, 10차례 타석에 들어서서 그 가운데 3번 안타나 홈런을 쳐내면 3할이 됩니다. 곧 3할은 성공할 확률이 30%라는 의미입니다.
야구에서 3할이면 타격왕에 도전할 수 있는 최고의 타자입니다. 3할을 넘는 선수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축구에서 10번 슛을 날려 세 골을 성공시키면 대단한 스트라이커입니다.
3할을 우리 인생 가운데 비유한다면 어떤 의미가 될까요? 열 번 중 일곱 번은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만 해도 성공적인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입학에 실패하든, 취업에 실패하든, 결혼에 실패하든, 사업에 실패하든, 젊은 날 한두 번 실패했다고 고개 숙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직 실패할 기회가 대여섯 번이나 더 남아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도전하기를 두려워하고 주저할까요? 그 이유는 10할을 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헛스윙 아웃을 당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타석에서 안타나 홈런을 쳐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10할을 칠 수는 없습니다. 10할을 치겠다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안타 하나 친 이후 전혀 타석이 들어서지 않는 방법뿐입니다.
평생 지금 앉은 그 자리에 앉아 있어도 좋다면 10할을 꿈꿔도 괜찮습니다. 남들은 안타나 홈런 치는데 박수나 치며 살고 싶다면 10할을 꿈꾸어도 괜찮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3할만 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과감하게 ‘풀 스윙’을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내공이 언제 쌓일까요? 가만히 있는다고 쌓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 실패할 때마다 하나씩 쌓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평생 아무것도 쌓을 수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실패를 극복하는 9가지 방법
“실패를 극복하는 9가지 방법”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1. 실패란 당신이 실패자란 뜻이 아니다. 아직 성공 자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2. 실패란 바보짓, 또는 불명예란 뜻이 아니다. 용감히 도전한 당신의 태도가 높이 평가될 수 있다는 뜻이다.
3. 실패란 당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4. 실패란 인생을 허비했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한 번 새로운 기분으로 도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5. 실패란 이제 포기하란 뜻이 아니라 더욱 노력하라는 뜻이다.
6. 실패란 이것으로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기회가 왔다는 뜻이다.
7.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도전 없이 성공이 있다고 생각지 말라.
8.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라. 쉬운 성공을 기다리는 자는 성장하지 못한다.
9. 두 번째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단지 성공을 목전에 두고 머뭇거림을 두려워하라
‘성공’이라는 글자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면 그 속엔 크고 작은 실패가 수없이 숨어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꿈이 있기 때문에 실패가 있습니다. 미국 37대 닉슨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이란 희망을 안겨주고, 실패란 시련과 고통을 안겨준다. 하지만 시련과 고통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인간이 실패나 패배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과정이요 또 다른 성공의 이름임을 알고, 실패를 부끄러워하는 자가 아니라 그 실패를 딛고 또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https://cafe.naver.com/judam11
종교신문1위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4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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