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6. 9. 11
본문: 요일 4:7-12
장소: 양평 덕천교회
제가 개척해서 28년 동안 목회하던 강변교회를 2008년 1월 13일 주일 은퇴한 후 다음 주일부터 지난 8년 8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 한 두 곳을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오늘은 양평에 있는 덕천교회에 처음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최기호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최기호 목사님은 합신 3회 출신인데 그 동안 뉴질랜드와 미국과 호주에서 25년 동안 공부도 하고 이민 목회도 하다가 작년에 귀국해서 지금 덕천교회에서 목회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주변 여러분들을 초청해서 모시고 함께 예배드리는 특별한 주일인데 부족한 사람이 여기 와서 설교를 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최기호 목사님과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만남과 나눔과 교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오늘 여러분들과 만남과 나눔과 교제를 하게 되어 아주 좋습니다. 저는 어린이들을 아주 좋아하는데 어린이들을 만나게 되어 아주 반갑습니다. 오늘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최기호 목사님이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하면 좋겠다고 해서 오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사랑"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예찬하면서 사랑이 없는 것은 설교도 예언도 믿음도 구제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예수님의 품에 안겨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과 심장의 움직임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느끼고 알게 된 사도 요한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믿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랑"이라는 단어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요한은 요한복음 스물한 장 전체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90번이나 사용했는데, 요한일서 4장 한 장에서는 "사랑" 이라는 단어를 30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7-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열한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는데, 십자가 아래 계속해서 남아있던 제자는 사도 요한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극진하게 사랑했고 예수님도 사도 요한을 극진하게 사랑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곱 마디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들으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죄인들을 향하신 지극하신 사랑을 온 몸으로 온 영혼으로 느끼면서 가슴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두 번째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세 번째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 네 번째 호소의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죄인들 사랑은 지극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사랑과 제자 사랑도 지극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를 버리시기까지, 성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시기 까지, 우리 죄인들을 지극하게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호소하며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9-11)".
사도 요한은 설교할 때마다 평생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예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설교만 했고, 밧모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다섯 가지를 골라서 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이사야 19장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찌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 19:23-25)".
앗수르와 애굽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원수의 나라 들이었습니다. 앗수르와 애굽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삼은 원수의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교류하고 애굽과 교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는 세 나라가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는 세 나라가 세계 중에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는 세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런 말을 하면 매국노라는 오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국가 보안법에 걸리게 되었을 것이었고 감옥에 붙잡혀 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국가 보안법에 걸려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와 애굽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가치가 없는 대상을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 쓰레기와 같은 인간들을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둘째로, 요나서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였고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악독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니느웨 성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서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죽을 걸어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천벌을 맞아 마땅한 악독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는 요나라는 선지자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욘 1:2)".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니느웨를 쳐서 없애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쳐서 외침은 죄인들의 양심이 찔려서 회개하여야 하겠기 때문에 그리 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렇게 죄악이 많은 이방 도시라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려고 선지자를 그곳에 보내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이것이 바로 성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분부에 반항을 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에 있던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것은 요나의 자세와 태도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거의 전체의 자세와 태도였고, 오늘날 대부분 보수주의자들의 자세와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부 성자 하나님의 분부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니느웨를 향하신 성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은 그대로 멈추고 만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고기 뱃속에 집어넣으시면서까지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로 가서 저들의 죄악을 쳐 외치게 하셨습니다. 결국 니느웨 사람들은 왕을 비롯해 모든 대신들과 백성들과 짐승들이 모두 굵은 베를 입고 부르짖으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사실 회개는 오래 믿는 사람들보다는 전혀 믿어본 적이 없는 죄인들이 더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니느웨는 철저한 회개를 했습니다. 결국 성부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에 내리시려고 했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고 저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요나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구원의 처사에 반항을 했습니다. 따지면서 하나님을 타이르기까지 했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욘 4:1, 2)". 그리고는 죽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3, 4)".
이기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인간은 근본적으로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가문 중심적이고 지역 중심적이고 민족 중심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가문이 아니고 자기 지역이 아니고 자기 민족이 아닌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것이 못된 인간들입니다. 북한이 잘 되고 일본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의 모순되는 듯한 지극한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반항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결국 성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호소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의 양심에 아니 우리들의 양심에 호소를 하셨습니다. 이것도 성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9-11)".
요나는 이 호소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대답하지도 않았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하나님의 호소의 말씀을 오늘의 한국교회 보수주의 목회자들이 바로 들을 수 있기를 바라고, 보수적인 정치 지도자들이 바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들이 이 호소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마태복음 9장 9-13절에 나타난 세리에 대한 성자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세리는 민족적으로 사회적으로는 매국노요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는 개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실 민족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고 정직도 모르며 돈만 알던 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개 같은 세리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의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함께 잡수셨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마 9:9-10)".
이와 같은 일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도덕적이고 비종교적인 일이었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은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이렇게 비난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
기가 막히는 일은 소위 진리에 치중하는 종교인들일수록 성부 성자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제가 너무 너무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그를 자기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하여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죽음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가장 값지고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존재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나중에는 세리장 삭개오까지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시며 그 집에 구원의 축복을 선언하시기도 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께서 이르시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5, 9)".
성자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은 일반 종교인들에게, 특히 바리새인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모순되는듯한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독한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을 싫어합니다. 거부합니다. 보수적 종교인들일수록 악독한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을 싫어합니다. 소위 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의인들이라고 자처했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죄인들의 친구로 오셨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제가 너무 너무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43-44절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읽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 44)".
이 말씀에 이해하기 힘든 모순되는 듯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 분명한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의 한국교회 보수주의 목회자들이 바로 들을 수 있기를 바라고, 보수적인 정치 지도자들이 바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누가복음 8장 1-3절에 나타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성자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자 예수님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 진하고 눈물겹고 아름다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폐인 중의 폐인이었습니다.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눅 8:2)".
이 말씀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문자적으로 일곱 귀신 들려 미쳤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도덕한 길거리의 창기였다는 것입니다. 셋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가지 죄악의 늪에 빠졌던 전형적인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설교자 맥클라렌이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 일곱 가지 죄악은 교만, 시기, 분노, 음란, 탐욕, 무절제, 영적 게으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귀신 들였던, 길거리의 창녀였던, 일곱 가지 죄악의 늪에 빠졌던 막달라 마리아를 귀신들에게서 놓아 주셨고, 창기의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고, 일곱 가지 죄악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시 종교계의 사고와 판단과는 정 반대되고 모순되는 듯한 사고와 판단이었습니다. 아마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반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인간 폐인, 길거리의 창녀, 죄인 중의 죄인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구원의 손을 펴시고 그녀를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로,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가장 충성스런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마 사도 베드로도 처음에는 불만을 토로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소위 종교적 진리에 역행하는 듯한 모순되는 듯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죄악의 늪에서 건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을 섬기는 봉사자까지 되었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1-3)".
너무 너무 놀라운 삶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만들어낸 놀라운 삶의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제일 먼저 나타나 보이신 사람도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고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분부하신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7,18)".
막달라 마리아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자 예수님의 모순되는 듯한 지극한 사랑이 만들어낸 열매였습니다.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1-3)." 이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마음의 귀를 활짝 열고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나타내 보이신 최고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말씀은 한 마디도 하시지 않으시고 모두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충만하신 말씀들만 하시었습니다.
가상칠언의 말씀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②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④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마 27:46). ⑤ "내가 목마르다(요 19:28)". ⑥ "다 이루었다(요19:30)". ⑦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19:46)".
그런데 가상칠언 중 처음 두 마디 말씀은 가장 악독한 죄인들인 로마 군인들과 강도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들인데,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말씀은 한 마디도 없었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충만하신 말씀들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을 바라보시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면서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 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희롱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은 후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못된 짓들만 하는 로마 군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분노와 증오와 욕설과 정죄의 말씀은 한 마디도 하시지 않고 도리어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다음과 같은 호소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얼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너무 너무 놀라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되는 듯 하고 역설적인, 지극한 사랑의 호소와 기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 사회에는 이와 같은 모순되는 듯한 역설적인 지극한 사랑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악독한 로마 군인들을 바라보시면서 하신 성자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호소와 기도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았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의 처절한 사랑의 호소와 기도를 들으시고 악독한 로마 군인들과 그들의 대장인 백부장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지 않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의 대장인 백부장은 인간 예수의 말과 행동과 움직임을 처음부터 자세하게 살피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상칠언을 한 마디 한 마디 주의 깊게 들으면서 놀라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가상칠언의 마지막 마디의 소리까지 들은 로미 백부장은 너무너무 놀라며 가슴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눅 23:46-49)". 아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못된 로마 군인들과 백부장은 그 후 어디를 가든지 눈물을 쏟으며 회개하면서 "그분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하고 또 하고 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지극한 사랑을 증거하면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하신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를 전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 한 사람도 성자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지옥의 저주를 당하는 대신 주님과 함께 낙원에 올라가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는데, 천국에서도 맨날 울면서 감사와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유창한 설교 때문에 로마 군인들과 백부장과 강도가 사죄와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오한 신학강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모순되는 듯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이 지난 2천여 년 동안 이곳 저곳에서 계속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 집사를 통해 사도행전 역사에 일어났고, 서머나의 폴리캅 감독을 통해 소아시아에서 일어났고, 성 프랜시스를 통해 중세교회에 일어났고, 토마스 선교사를 통해 조선교회에 일어났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통해 한국교회 안에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지극한 사랑을 통한 죄 사함과 구원과 놀라운 삶의 변화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지극한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자기의 두 아들을 총살한 악독한 죄인이었던 안재선의 삶이 180도 변화되었는데 안재선이 아버지에게 써서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아버님 전상서 천부님의 은혜 가운데 아버님 어머님 기체 만강하심을 비옵니다. 소자는 객지서 하나님의 진리의 힘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감사합니다. 이 죄인은 아버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죄값을 회개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중생하였습니다. 중생하였으나 소자는 인간인고로 때때로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여 주심을 진실로 감사하며 죄를 회개합니다. 중생하고 보니 하나님께 몸 받쳐야 되겠습니다. 나의 있는 것 모든 것 다 받쳐야 되겠습니다. 우리 신자는 다 순교할 의무가 당연히 있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기도의 덕인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의 피 공로로 중생하였으니 손양원 목사님의 장남 될 자격으로 중생의 양식을 언제나 잊지 않고 빽빽이 채우겠습니다. 아버님 모든 것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사랑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니 사도 바울의 뒷길을 따라가고자 한걸음 두 걸음 걷고 있습니다. 두 형님의 뒤를 따를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나이다. 1949년 9월 15일 편지 받아본 즉시 저녁 안재선 상서."
너무 너무 감동적인 내용의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안재선은 완전히 변화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참회와 감사와 간증과 헌신의 삶을 살다 죽었습니다. 안재선의 아들은 나중에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유창한 설교나 정통 진리 선포 때문에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펴신 지극한 십자가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이 너무 따뜻하고 너무 부드럽고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일어난 이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순되는 듯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고 싫어하면서 거부합니다. 일본 사람들도 싫어하고 북한 사람들도 싫어하고 부도덕하고 악한 사람들도 싫어합니다. 우리들이 의인들이라고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와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와 생활 스타일이 다르고 나와 가치관이 다르고 나와 교파가 다르고 나와 신학이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정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못된 우리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고 우리들의 지정의언행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지극한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조금씩이라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2007년 1월 3일에 쓴 글 하나를 읽어드리므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 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 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쓴 글)."
종교신문1위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93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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