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자’
장소: 의정부 한꿈교회
날짜: 2020년 4월 12일
제가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주일부터 지난 12년 3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2015년 8월 23일 주일 여기 의정부 한꿈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이후 2016년 7월 3일 주일 두 번째로 와서 “헌신과 섬김의 귀중한 삶”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7년 8월 6일 주일 세 번째로 와서 “건강한 교회와 행복한 성도”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8년 6월 7일 주일 네 번째로 와서 물 댄 동산 침례교회와 함께 모여서 예배 드리면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9년 6월 16일 주일 다섯 번째로 와서 물댄동산 침례교회와 함께 모여서 예배 드리면서 “가난과 고난과 수고와 슬픔과 아픔의 유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2020년4월 12일 주일 여섯 번째로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저를 불러주신 임용석 목사님과 성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무슨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임용석 목사님이 오늘이 부활주일이니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하면 좋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부활과 함께 성탄과 십자가와 재림을 포함해서 “성탄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자” 라는 좀 긴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부활 주일에 잘 맞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3:1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라고 권면을 했고 히브리서 12:2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는 일보다 더 귀중하고 더 보배로운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볼 때 우리들의 삶과 운명이 귀중하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기질과 성향이 아름답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살과 피와 세포가 귀중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때라서 우리들의 인생이 결정되고 우리들이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세상만을 생각하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고, 돈 만을 생각하면 탐욕적인 사람이 되고, 쾌락만을 생각하면 정욕적인 사람이 되고, 권력만을 생각하면 폭력적인 사람이 되고, 명예만을 생각하면 교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만하며 칭찬할만하며 덕이 있고 기림이 있는 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인간은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땅만을 바라보면 땅에 속한 사람이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연예인만 바라보면 연예인 비슷하게 될 것이고, 정치인만 바라보면 정치인 비슷하게 될 것이고, 기업인만 바라보면 기업인 비슷하게 될 것입니다. 문화적 유행만 바라보면 탤런트 비슷하게 될 것이고, 종교적 유행만 바라보면 무당 비슷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시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자기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사도 요한은 나중에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 4: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계 21:1).
사도 요한은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이 되었고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탄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자” 라는 좀 긴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1. 말씀이 육신 되신 성탄의 예수님
첫째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탄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성탄의 날 우리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을 때, 천사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고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성자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시고 우리 사람들 가운데서 사시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아니 성자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 을 지니시게 까지 죄셨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일은 이 우주에 없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볼 때 우리들은 너무너무 놀라서 자빠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고와 가치관에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와 자기의 기질을 고집하는 유교적 전통에서 벗어나게도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되 어른이 되시지 않고 한 “아기”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사 9:6).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마 2:11).
“아기”는 모든 사람에게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아기”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천사나 어른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한 “아기”로 오신 이유는 범죄한 우리 인간들에게 무서운 존재가 아닌 약하고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오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맙고 황송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졌습니다. 정치가들은 물론 종교인들의 모습마저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인들을 심판하는 판사나 검사의 모습을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너무 힘이 세어졌고 너무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탄의 날 성자 예수님께서 한 “아기”로 오신 것은 누구에게나 약하고 친근하고 사랑스럽게 찾아가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성탄의 날 우리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을 때, 또한 부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아니 “가난”이 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은 마구간의 여물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들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지적했습니다(고후 8:9). 성자 예수님께서는 일생을 “가난하게” 사시다가 “가난한” 모습으로 벌거벗은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왜 성자 예수님께서 “가난”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까?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시기를 원하셨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가난한” 자들에게 첫째 복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 6:20).
지금 한국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너무 부해지고 너무 강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성탄의 정신은 “가난”의 모습을 지니고 “가난한” 자들에게 찾아가서 사랑과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성탄의 날 우리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을 때 또한 평안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고, “고난”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아니 “고난”이 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헤롯 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고난”에 처했고, 애굽으로 도망을 가야 하는 “고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모습을 “고난”의 종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3, 4).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고난”의 운명을 짊어지시기 위해서 “고난”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고난”의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얼마나 황송하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고난과 죽음을 사모하며 그의 몸에 가난과 고난과 죽음을 지니고 살다 죽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랑한 손양원 목사님도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스승으로 “죽음”을 소원으로 삼으면서 가난하게 고난을 당하면서 살다가 기쁘게 죽으셨습니다.
현대인들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고 평안과 부요함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성탄의 정신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고 불우한 동포와 지구촌 형제들의 “고난”의 운명을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고난”의 모습을 지니고 “고난” 당한 자들에게 찾아가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 성탄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탄의 예수님은 “아기”가 되셨고 “가난”이 되셨고 “고난”이 되셨는데, 우리들은 여기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시고 지극히 낮아지신 “온유”와 “겸손”의 극치를 봅니다.
2. 물과 피 쏟으신 십자가의 예수님
둘째로, 물과 피를 쏟으면서 죽으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십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성자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들은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모습이 아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병들에게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칼을 뽑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팔을 벌리시며 하늘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23:34).
성부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에 어긋나는 듯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드리신 것이었습니다. 가상 칠언 중에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자 예수님께서는 옆에서 자기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한 강도에게 진리와 정의의 칼을 뽑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팔을 벌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것도 모세의 율법과는 어긋나는 판결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가상칠언 중에서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는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기운이 너무 많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소위 진리의 깃발을 너무 세게 휘두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우리들의 가슴에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물결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가슴에 넘치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물결이, 손양원 목사님의 가슴에 넘치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물결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나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들과 모슬렘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나타내 보이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볼 때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과 영혼에도 모든 사람들을 향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물결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넘치게 될 것입니다.
3.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예수님
셋째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십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은 두려움과 슬픔과 좌절에 쌓여 있던 제자들에게 생기와 생명을 불어넣으신 생명의 주님이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혁명적인 생명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부활과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지만, 사실은 부활이 우리의 운명을 완전하게 바꾸어 놓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생기가 넘치게 되었고 기쁨이 넘치게 되었고 사명감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슬픔에 싸여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삶이 하늘과 통하고 영원과 통하는 높은 차원의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라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마리아는 기쁨과 놀라움의 전율에 떨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과 영혼에는 생기와 기쁨과 사명감으로 넘쳤을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새로운 사명이 부여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하라는 사명이 부여되었습니다(요 20:17).
막달라 마리아는 생기와 기쁨이 충만하여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엠마오로 걸어가던 두 사람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을 때 눈이 밝아졌고 가슴이 뜨거워졌고 발걸음이 빨라지는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저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는 생기와 기쁨과 사명감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저들은 즉시 엠마오로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문 닫아 걸고 숨어있던 열한 제자들에게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한 주간 동안이나 문 닫아 걸고 숨어있던 열한 제자들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저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생기가 넘치는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너무 놀라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결국 열한 제자들의 남은 생애와 삶과 죽음이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열한 제자들은 땅까지 달려가서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순교의 제물들이 되었습니다.
배신자 베드로가 부활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만난 후에도 여섯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등지고 디베랴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다가 부활의 예수님을 또 다시 만났을 때, 베드로와 제자들의 믿음이 회복되고 사랑이 회복되고 사명이 회복되는 진정한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는 평생 울면서 참회하는 참회의 사람이 되었고 평생 울면서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었고 십자가를 지고 삶을 마무리하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울의 삶과 운명도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서 “사울아, 사울아” 라고 부르셨을 때, 그의 살과 피와 세포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다. 결국 그는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고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사람이 되었고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사람이 되었고 십자가를 지고 삶을 마감하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 “주의 날”에 부활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라고 말씀했을 때 그는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닌 이미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바꾸어졌고 하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하늘의 계시자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들의 삶에도 생명이 약동하는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날 때 세상 영화에 붙어있던 시시한 삶으로부터 하늘의 기쁨과 연결된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을 때 길선주 도사의 삶과 운명도, 이기풍 깡패의 삶과 운명도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길선주에게 나타나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라고 부르셨을 때 길선주의 삶과 운명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길선주는 조선 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이기풍에게 나타나서 “이기풍아, 이기풍아” 라고 부르셨을 때 이기풍의 삶과 운명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기풍은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삶과 운명도 변화됩니다. 시시한 세상에 얽매어 사는 부끄러운 삶으로부터 하늘과 통하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기쁨과 생기와 사랑과 사명감에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기독교는 만남과 변화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성탄과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고 그리고 만나는 만남과 변화의 종교입니다. 교육도 훈련도 필요하지만, 만남과 변화가 없는 기독교는 형식적인 종교가 되고 맙니다. 행사도 프로그램도 필요하지만, 만남과 변화가 없는 기독교는 기쁨이 없는 피곤한 종교가 되고 맙니다. 떠들썩한 마케팅의 종교가 되고 맙니다.
만남이 삶과 운명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만남이 진정한 부흥을 가져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슴이 뛰는 뜨거운 감사를 주님께 드리고 또 드렸습니다. 이런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기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어떻게 나에게도 이런 삶과 운명의 변화를 허락하셨습니까? 예수님, 어떻게 나에게도 주님 만남의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셨습니까? 예수님, 어떻게 나에게도 죽은 것이 살아나는 부흥을 경험하게 하셨습니까? 예수님, 어떻게 나에게도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며 살게 하셨습니까? 예수님, 어떻게 나에게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가 죽어도 기뻐할 수 있는 마음까지 주십니까? 예수님, 너무너무 황송하고 너무너무 감사한 것뿐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나 위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님! 나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 나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나도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예수님을 위하여 죽게 하시옵소서!”
부활의 계절에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들을 만나주셔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 겸손한 긍휼의 마음과 사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떠들썩한 행사들이 아닌 조용한 삶의 변화가 필요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4.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
넷째로, 부활 승천하신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십시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부활 승천하신 그리고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 4: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계 5: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계 21:1).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
종말의 관점에서 재림의 예수님 앞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을 때 우리는 방심하게 되고 자만하게 되고 무책임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고 또는 낙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시는 재림의 예수님 앞에서 종말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볼 때 우리들은 정신차리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책임감 있게 되고 소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재림의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의 소망의 극치이고 우리들의 영광의 극치입니다. 재림의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의 겸손의 비결이고 우리들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서머나의 감독도, 길선주 목사님도, 이성봉 목사님도, 주기철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재림의 예수님 앞에서 종말의 관점에서 자신들을 바라볼 때 고난과 환난과 핍박을 이기며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죽도록 충성을 다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은 천국과 종말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스승으로” “죽음을 소원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옥중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이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우리도 다시 오실 성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재림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재림과 심판의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3-5).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그리고 사도 요한처럼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이제 “성탄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자”는 제목의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성탄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는 일보다 더 귀중하고 더 보배로운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볼 때 우리들의 삶과 운명이 귀중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기질과 성향이 귀중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살과 피와 세포가 귀중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인생이 결정되고 우리들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인위적이고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이나 우리들 자신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대신 우리들을 위해서 세상에 오신,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우리들을 위해서 죽음에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우리들을 위해서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찬송가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162, 175장)를 함께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
종교신문1위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0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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