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3월 16일
본문: 갈라디아서 5:22~26
설교: 이수영 목사
제목: 성령의 열매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이 세상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불신자들에게는 없는 영적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삶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었습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도록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삶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인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영적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졌고 하나님나라의 삶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 나라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의 상실과 무지 속에 그대로 내버려두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상실하게 만든 원인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알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려고 우리 대신 그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다 죄에 물들어 타락하고 부패하여서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노예가 되어 육체의 일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보내신 이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면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성령의 열매를 맺히게 해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2절에서 그 성령의 열매가 어떤 것들인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의 열매들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들을 열거하며 제일 먼저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어쩌면 단순히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순서적으로 제일 먼저 오는 것이라기보다 뒤따르는 여덟 가지 열매를 가능하게 하거나 그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데 무슨 희락이 있고 화평이 있으며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가능하겠습니까?
사랑에 이어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것이 희락과 화평입니다. 바울은 롬14:17에서 이 희락과 화평을 하나님나라 삶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나라입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는 먼저 의를 말했습니다. 이 의를 달리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그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입니다. 그 의가 곧 하나님과의 평강입니다. 하나님과의 평강이 확보될 때 참된 희락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강 즉 바른 관계 없이 추구하고 누리는 모든 희락은 우리를 속이는 거짓 희락이며 우리를 망하게 하는 악한 희락입니다. 의 또는 사랑과 평강과 희락, 이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 그의 역사로 우리에게 맺히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 첫 세 가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열매라고 분류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 이어서 열리는 열매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열매들입니다. 그것들이 바로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열매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성령의 열매들을 열거하고는 곧 이어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하는데 그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성령도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분이고 하나님 자신이시며 율법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하나님의 법이 성령의 열매들을 금지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증거는 외적인 의식에의 참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합니다. 여기서 "육체"라고 한 것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이며 개인적이고 사적인 우리의 실존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욕"이라고 한 것은 달리 말하면 "열정"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갖거나 이루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또 "탐심"이라 한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의욕"입니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의욕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모든 열정과 의욕을 다 죽여 버리고 살아야 한다면 너무나 재미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기쁨, 진정한 행복을 깨달아 아는 길이라고 사도 바울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그리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존재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이겠습니까? 그런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모든 열정과 의욕을 다 죽여 버린다는 것은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광야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 광야를 경험한 사람만이 광야 속에 존재하는 오아시스의 행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을 다 버린 이들만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의 기자가 뭐라고 합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시1:1-3)고 하지 않습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반드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가 있는 사람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의 증거입니다. 그 증거로 나타나는 것이 사랑이고 희락이고 화평이며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들은 없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는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사람들이며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갈5:21).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쓰기를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합니다. 앞서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순서대로 세 가지씩 각각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 사이의 관계, 우리 자신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음을 언급한 바 있지만 26절은 그 세 가지 관계가 잘못 됨을 가리키는 말들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할 영광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르치는 일이고, 서로 노엽게 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망치는 일이며, 서로 투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지 않을 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고 서로 노엽게 하며 서로 투기하는 것은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 결코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 전 40일 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원래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부활주일 전 6주간이면 42일입니다. 그런데 서방 교회에서는 주일에는 금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섯 차례의 주일을 빼면 36일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 모자라는 4일 채우기 위하여 그 전 주간 수요일부터 수, 목, 금, 토의 나흘을 더해서 40일을 채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순절의 가장 큰 의미는 참회와 자기부정입니다. 이 사순절의 첫 날인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라 부릅니다. 재는 유대인들에게는 참회의 표지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을 시작하는 이 <재의 수요일>에 재를 이마에 바르고 죄를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했습니다. 사순절에서의 재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 해의 종려주일에 사용한 종려나무 가지를 모아서 태워 생긴 재를 사용하여 재의 수요일을 지냈던 것입니다. 이 재는 우리 자신을 모두 태워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과 열정으로 우리를 온전히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뜻합니다.
재는 참회를 통해 정화되고 순수해짐을 뜻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던 주후 3세기 중엽에 박해자의 군사들이 접근할 수 없는 이집트의 사막으로 도피하여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는 수도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막의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사막 한 복판으로 들어가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거기 들어가 살거나 접근로가 없는 바위산의 동굴에 들어가서 살며 수도사들이 두레박 광주리에 얹어서 올려 보내는 최소한의 빵조각을 먹으며 수도생활을 해야 합니다. 정해진 기한이 없는 이 견습기의 수련을 잘 견뎌내야 수도원으로 들어와 수도사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20년 전인 1994년 이집트 정교회를 방문하고 그들의 사막수도원을 찾아갔을 때 직접 확인했습니다. 테베(Thebes)의 요셉이라 하는 한 사막교부는 하나님 눈에 높이 평가되는 사람들 셋 중에 사람 맘에 드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게 행하는 사람을 꼽았습니다. 사순절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생각과 욕망과 고집을 다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지는 순수함으로 되돌아가는 훈련을 하는 절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뒤틀린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고집을 다 비워야 전능하시고 완전하시며 언제나 올바르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권능으로 채워지는 우리를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는 또한 우리 자신을 아무 가치 없는 티끌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뜻도 갖습니다. 시103편의 저자는 말했습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4) <재의 수요일>에 교인들은 재를 받으며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에게 하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창1:19의 말씀과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한 욥42:6의 말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순절의 주된 의미의 하나가 자기부정입니다. 자기부정은 자기 자신이 티끌 같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또 아무런 소유도 제약도 없는 새털 같이 가벼운 존재로 여겨지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나를 짓누르고 옥죄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기쁨과 날아갈 것 같은 시원함을 느껴보는 것은 사순절에 해볼 만한 체험입니다. 제가 어지러움증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졌던 최근 집에서 쉬면서 새문안교회 일 외의 모든 외부의 직책을 다 내려놓으려고 사임서를 썼습니다. 무슨 의장, 이사장, 회장, 공동대표, 부회장, 부원장, 이사 등 무려 스무 가지 이상의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하고 싶거나 원해서 맡은 직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두 번 세 번씩 사양하고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맡은 직책들입니다. 그 중 상당수는 새문안교회의 담임목사이기에 맡겨진 것입니다. 그 모든 기관에 사임서를 일제히 발송하고 난 지금 저는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 참된 평안과 억눌림 없는 삶을 찾는 이번 사순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종교신문1위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7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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